"조국광복회" 라는 단체는.?

●  조국광복회


 

 

일제 때  독립운동단체 이다


 

설립일시로는 1936년 5월 5일이며

설립자는 : 북한의 김일성이다



 

북한에서 일제시절 김일성이 조직한 우리 민족 최초의 반일민족통일전선 조직으로 선전되고 있는 단체이다



 

**  북한의 문헌들이 서술하고 있는 조국광복회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은 1936년 2월 남호두(  소재)회의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확대하기로 천명하고, 그후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강령, 규약, 창립선언을 작성하고, 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의 준비를 했으며, 그러한 준비에 기초하여 1936년 5월 동강(  소재)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조국광복회라는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체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김일성은 그해 5월 5일 조국광복회의 창설을 선포했으며, 조국광복회의 회장으로 추대했다. 조국광복회는 지하혁명조직이었다.

 

 

김일성은 조국광복회 창건 후 그 조직을 확대 강화하기 위하여 압록강 연안 일대는 물론 국내에 정치공작원들을 수많이 파견하였다. 김일성은 1937년 초에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결성했으며, 그에 따라 한만 국경일대에 조국광복회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37년 1월에는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의 하나인 '조선민족해방동맹'이 결성되었고, 그 산하에는 40여개의 하부조직이 결성되었다. 

 

조국광복회 조직망은 여러 가지 명칭을 사용하면서 백두산 근저지를 중심으로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강원도 경기도 경상남도를 비롯한 전국의 도시와 농촌들에 세력을 확대했고, 만주의 동부, 남부, 북부 일대의 넓은 지역에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김일성은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작성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광범한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실현하여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조선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2) 재만 조선인들은 중국민족과 연합하여 일본 및 ‘만주국’을 전복하고 중국영토 내에 조선인민의 민족자치를 실행할 것, 

 

3) 일본군대 헌병 경찰 및 그 주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 


 

4) 일본국가, 일본인,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고, 일부분으로는 빈민을 구제할 것,

 

 

5)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을 폐지하여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 농, 상업을 발전시킬 것, 


 

6)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전취하고 왜놈의 공포정책과 봉건사상장려를 반대하며 일체 정치범을 석방할 것, 

 


7)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 등 차별이 없는 평등을 실현할 것,

 

 

8) 노예노동과 노예교육의 철폐, 강제적 군복무 및 청소년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하며 우리 말과 글로써 교육하고 의무적인 무상교육을 실시할 것, 


 

9) 8시간 노동제 실시, 노동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노동법의 확정, 국가기관으로부터 각종 노동자의 보험법을 실시하며 실업자를 구제할 것, 


 

10) 조선민족에 대하여 평등적으로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연합하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하여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나라 및 민족과 동지적 친선을 유지할 것 등이다.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구현한 것이며, 우리 민족 혁명사에 최초로 등장한 맑스·레닌주의적 강령인 이 10대 강령의 사상은 해방 후 북한 공산당의 정치노선과 20개조 정강에 계승되고 구체화되어 북한의 혁명과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확고한 지침이 되었다.


 

북한정권의 역사조작에 비판적인 남한학자들은 김일성이 조국광복회를 조직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제하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단체 중에 조국광복회라는 단체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조직된 오성륜(, 가명 ) 등이 중심이 된 재만한인조국광복회(滿)가 1936년 6일10일 결성된 바 있으며, 이 재만한인조국광복회와 그들의 활동을 북한정권이 왜곡하고 과장하여 김일성이 조국광복회를 조직했고 그 활동이 광범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에 의해 현재는 김일성이 설립하고 활동한게 맞는걸로 밝혀지고 있다


 

 

   이상..


만주 동북에서의 무력항쟁..02편. (시리즈)

02편.





아직도 북한의 공식 입장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간되면서 과거와는 상당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도 사실이다. 

 

김일성은 회고록을 통해 자신을 도와주었던 오동진, 양세봉, 손정도, 현익철 등 국민부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을 비롯해, 임시정부, 여운형의 건국동맹이나 이재유 등의 국내 사회주의 재건운동 등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20210504190248_kagzyuax.jpg         왼쪽의 파란 글자 클릭하면 관련 사진이 나온다.


▲ 1920년대 만주에서 독립군 총영을 이끌며 무장투쟁을 벌였던 맹장 송암 오동진.

오동진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조선국민회’를 함께 한 동지였고, 길림시절 양세봉, 손정도 등과 함께 김일성의 중요한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오동진, 손정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과거 종파단체로 규정해 거의 인정하지 않았던 한인사회당이나 상해파·이르쿠츠크파 등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그 역사성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1925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그 후의 재건 활동에 대해서도 여전히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지만 당 창건의 합법칙성을 그것대로 인정하고 있다.

 

자신과 대립하며 ‘종파주의’로 낙인찍혔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지만 종파나 분파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나아가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이었던 경성콩그룹의 인물들인 김삼룡과 이현상이 김일성이 이끈 '조국광복회'의 국내 책임자였던 박달과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나 연계를 모색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반종파투쟁’ 과정에서 북한의 역사서에서 사실상 완전히 사라졌던 연안계열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대해서도 일정한 평가를 하고 있다.

이처럼 김일성은 회고록을 통해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항일민족운동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빌린 것이기는 하지만 ‘수령’이 남기고 간 항일운동에 대한 포용적 시각이나 열린 관점을 북한의 공식 역사가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북한에서 항일투쟁에 대해 새롭게 정리할 수 있는 유연한 상황이 마련된 것은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상황과도 맞물려 중요한 의미가 있다. 


어찌 보면 김일성의 회고록은 “냉전해체 이후 위기 속에서 남긴 ‘마지막 유훈’”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동안 “‘주체사관’으로 인해 제약되었던 역사인식”을 김일성의 권위를 빌어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 책(『세기와 더불어』)은 북한이 향후 변화하는데 있어서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근거로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동북항일연군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서는 김일성의 회고록과 북한의 공식 연구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도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이루었다. 

 

여전히 남북 간에 간극은 존재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규명이라는 차원에서는 상당한 접근이 이뤄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접근은 이제는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말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상...          다음편에서 계속~~





1930~40년대의 만주항일운동의 실체..04편

04편.





혹시 하얼빈 시내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지도를 보고 대략 이해할 수도 있겠군요~




검은 선이 하얼빈에 가면 누구나 가보는 중양대가입니다.

그 다음 동쪽의 길이 상즈대가, 그 다음의 도로가 자로린가입니다. 자오린가 북쪽에 공원이 바로 자오린 공원입니다.


자오린가 중간에 바로 리자오린(李兆麟) 장군 기념관이 있습니다.



 

 

1930년대 만주에서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동북항일연군(세부적으로는 여러 명칭이 등장하지만)이라는 체제로 

양측이 한데 협력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했습니다.

 


일제의 관동군과 만주국의 만주군에 대항하여 때로는 유격전으로, 때로는 강력하게 부딪쳐 피 터지는 전투를 했고, 수없이 죽었습니다.

일본에게 크고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물론 승전 뒤에는 일제는 대대적인 토벌전과 함께 항일연군에 협력한 중국인과 조선인 백성들을 학살하여 피의 보복을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오해가 생겨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 흐름으로 보면 만주에서는 항일 전투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혈맹이었던 것이지요.


허형식에 관한 자료를 읽어가면서 자오상즈와 리자오린이란 중요한 이름을 알게 됐습니다.

그 이름이 이 길의 이름인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터라 ......

 


리자오린 장군 기념관. 

기념관의 전시 내용에, 혹시라도 허형식 또는 조선인에 관한 언급이 어찌 되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조선인 동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인물은 한 사람도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아쉽지만, 일단은 현장을 확인하는 마음으로~




              입구입니다.



이 사람이 리자오린이군요.      1946년 해방 이후 국민당 특무대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일본군 토벌대 ..........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리자오린이 이끌던 부대의 하나입니다.

 




1940년 겨울 관동군과 만주군의 혹독한 토벌전에 밀려 결국 국경을 넘어 소련의 연해주로 밀려났던 시절의 기록입니다.

이때 같은 맥락에서 연해주로 건너간 인물 가운데 김일성 최용건 김책 등이 있었습니다. 



1963년 저우언라이 총리가 북한의 최용건과 함께 참배하는 사진이 있습니다.

최용건이 바로 김일성 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조선인 전사들의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런 참배가 있었고, 

그 사진이 이 기념관에 걸린 것이지요.



리자오린이 암살 당한 곳




리자오린 추모대회 기사도 있군요.

 

 

일단은 여기까지 현장 확인 정도로 .......... 허형식의 흔적은..

 

 

 

        이상..





 




 











 



만주 동북에서의 무력항쟁..01편 (시리즈)

01편.         (시리즈)





☆☆☆  동북항일연합군

 

 

 

●  만주지역 항일투쟁과 동북항일연군


 

 

 

**  국경을 맞댄 만주에서 벌어진 항일무장투쟁의 여파..


 

만주사변·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 관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군)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면,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으로 대표되는 항일무장무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중국 충칭과 옌안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조선인들이 그곳 소식을 전해듣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만주와 연해주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다가 그 지역의 정세는 바로 조선의 치안상황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국내 신문들에도 국경의 치안상황은 바로 보도되었고, 국경을 중심으로 한 만주 등지의 소식은 국내 민중의 입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1930년대 말부터 해방 전까지 국내에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바로 ‘김일성’(김성주)이었다.

 

변은진의 연구에 의하면 1930년대에 조선과 국경을 접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김일성은 이 시기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된 소규모 비밀결사에서는 거의 ‘신화적’ 존재였다.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인물들은 많았으나 그 가운데서도 유독 김일성의 이름이 두드러졌던 것은 무엇보다도 국경지대에서 직접 일본 군·경과 전투를 자주 벌여 이름이 신문에 자주 오르내렸던 영향이 컸다. 특히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전투’ 소식이 알려진 이후 김일성이란 이름은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 때문에 일제 말기 김일성은 여운형과 함께 청년들에게 가장 관심을 끌었던 인물이 되었다.


20210503063326_pnezbiuz.jpg         **  왼쪽 파랑 영문주소를 클릭하면 관련 사진이 나온다.

▲ ‘김일성비단’의 월경 함경북도 삼장면 습격 소식(동아일보, 1940. 5. 18.). ‘보천보 습격사건’(1937.6.4.) 외에도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사이에 ’김일성부대‘가 국경을 넘어 들어와 일본군경과 전투를 벌인 사실들이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지금은 김일성의 항일운동 사실을 부정하거나 ‘가짜 김일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김일성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

 

특히 한국전쟁이라는 예민한 주제 때문에 김일성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다루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학계에서는 항일무장투쟁과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아직도 동북항일연군의 활동과 관련해서 이견이 있는 부분들이 남아 있고 해석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 해석을 두고 남북 사이에 여전히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은 남북이 공동 연구를 통해 논의를 진전시켜 가야 할 부분이다.

 

한국 사회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오랫동안 금기시 되었다면, 반대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빨치산 활동만을 이른바 유일한 ‘혁명전통’으로 보고 그 외의 국내외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거나 극단적으로 폄하한 측면이 있었다.

 

 

아직도 북한의 공식 입장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간되면서 과거와는 상당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상...     다음편에서 계속~~^^





 







한반도의 분단 배경..03편.(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마지막편

03편.
 

 

 

 

마지막편..



 

 

 

***  트루먼 집권과 달라진 정책




 

 

트루먼은 루스벨트가 1945년 4월 갑작스레 사망한 바람에 부통령 자격으로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등장이야 말로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운명을 막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을는지도 모른다.



" 루스벨트가 파시즘을 증오했던 인물이라면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증오했던 인물임. "


그는 상원의원이던 시절 이런 말까지 서슴없이 했었다.


 

 

숏다리 양놈 트루먼 : " 독일군들과 소련군들이 피가 다 빠질 때까지 싸웠으면 좋겠네. " 

 

 

그런 이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태평양 전쟁에 있어서도 대대적인 정책 변경이 강행됐다. 



 

숏다리 양놈 트루먼 : " 소련한테 전리품을 줘서는 안 됨.  분명히 아시아 동쪽으로 공산주의가



확산될꺼임. "  방법은 단 하나 ! 일본으로부터 빨리 항복을 얻어내 소련의 참전을 원천 봉쇄하는 것." 

 


그리하여 트루먼은 한시라도 빨리 일본에게 항복을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도록 명령한


다.  독가스 등 엄청난 생화학 무기가 대량 제조되었고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부터 매달리고 있었던 핵


개발 프로젝트인 ' 맨하튼 계획 ' 의 완성을 다그쳤다. 




 

숏다리 양놈 트루먼 : " 얼른 완성하도록! "


 

 

그리하여 1945년 7월 미국은 핵실험에서 성공하게 된다.(뉴멕시코주 사막에서 행해진 핵실험)


이런 사실을 트루먼은 스탈린한테 자랑하고 싶었다. 같은 달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


에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숏다리 양놈 트루먼 : " 님아, 우리 엄청난 무기를 만들었음." 

 



빨갱이 대마왕 스탈린 : " 축하해요. 그게 뭔데요 ? " 

 



숏다리 양놈 트루먼 : " 뭐 흠 그런게 있어요."


 

 

하지만 스탈린은 첩보를 통해 이미 핵개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서둘러 작전


을 개시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국물도 없어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소련의 만주작전 ( 8월 폭풍작전 )


 

 

5월에 독일이 패망하자(즉,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했다.)


소련군은 여유가 생겼고 전리품 획득과 공산주의 확산이라는 목적을 위해 재빨리 동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125만 명의 관동군 (만주군 포함) 이 주둔하고 있는 만주를 공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


다.   " 만주 땅이 좀 넓어야지. 게다가 쳐들어 가려면 험준한 산악지형도 거쳐야하고.."     ( 참고로 만


주 벌판은 두개의 거대한 산줄기로 가로 막힌 지형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오히려 일본군이 더욱 방심하고 있었다.  그들의 오직 관심사는 닥쳐올 미국과의


본토  결전에 있었다.


 

" 설마 소련이 쳐들어오겠어? "


 

일본군 수뇌부들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



8월 7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날리자.  다음날 스탈린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에게 총


공격을 명령한다.   무려 160만명의 대군이었다.   당시 소련군의 진격 속도는 엄청났다.


탱크와 야포, 전투기를 앞세운 엄청난 화력에 일본군은 그야말로 혼비백산 했다.


게다가 양동작전에 포위되고 말았으니 일본군은 손을 들고 항복하기 바빴다.


그렇게 정신이 없을 무렵, 8월9일에는 나가사키에 또다시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 뜨악 ! "   일본은 전의를 완전 상실하고 만다. 


그리고 8월10일 조건부 항복의사를 밝힌다. 



" 무조건 항복하겠스무니다. 대신 천황제는 유지해주셨으면 하무니다. " 


이때 미국은 받아줄까 말까로 고민을 한다.

 


그런데 다음날인 8월11일 소련이 함경북도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   " 오마이


갓 !  한반도를 결국 빼앗기게 생겼네. "


 

한 번 소련군이 발을 들여놓은 이상 무조건 공산화를 시키고 만다는 건  이미 유렵전선을 통해  뼈저


리게 느꼈던 미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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