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때) 혜산사건 및 보천보의 진실

●  ( 일제강점기때 ) 혜산 사건 및 관련자료들. < 보천보의 진실 >

 

◇  혜산사건이란 함축적으로 설명하면.. (1937년에서 이듬해까지 걸쳐 발생한 항일조직사건을 말한다.)

 
☆ 이 혜산사건을 좀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일본 관헌측이
김일성(金日成) 부대의 보천보(普天堡) 습격작전후 국내 연계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광복회 회원 188명이 기소된 사건이다.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사장 김일성의 부대가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함으로써 일본 관헌 측은 상당히 당황하였다.

최초로 항일빨치산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친 데다,그 결과가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그들의 존재가 국내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김일성 등에게
이 작전의 성공은 커다란 자신감을 주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주에서의 조국광복회 조직 확대 사업, 항일연군 여성대원들의 만주 장백현(長白縣)거점 정착사업 등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보다 역점이 두어진 사업은 조국광복회 조직의 조선 내부 확대사업이었다.

기존 갑산공작위원회(甲山工作委員會) 조직 외에 신갈파, 흥남·원산·무산·성진·명천 등지에 직접 공작원이 파견되었으며, 흥남에서는 조국광복회 지부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 관헌 측은 보천보작전 후 필사적으로 수사를 진행하여, 1937년 9월 이 작전에 가담했다가 재차 지령을 받고 혜산읍에 잠입한 3명이 체포된것을 단서로 10월까지 관련자들을 색출하였다.

 
10월 10일에는 군경을 월경시켜 보천보작전에 앞서 보천보를 정찰하고, 도강과 전투를 지원했던 권영벽(權永壁) 등 8명을 장백현에서 체포하였다.


이후 11월 중순까지 조선 내에서 162명,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되어 양 지역의 조국광복회 조직은궤멸되었다. 1938년 9월 마지막으로 동만특위(東滿特委) 산하 조선파견지부 책임자 박달(朴達) 등이 체포되면서 수사가 종결되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은 총 739명, 그 중 188명이 기소되었다.

1941년 8월 함흥지방법원에서 권영벽·이제순(李悌淳)·박달 등 6명이 사형, 박금철(朴金喆) 등 4명이 무기징역을 받았다. 유기징역은 15년 4명, 13년 6명, 12년 9명, 10년 18명, 8년이 14명이었으며, 7년 이하가 104명이나 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박달만이 병으로 집행이 연기되어, 1945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사건의 수사와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김일성의 신원도 분명해졌다. ≪사상휘보 思想彙報≫ 제20호에 실린 혜산사건 보고 부문에는 김일성에관한 본명, 나이, 출생지, 항일무장투쟁 투신과정등의 경력이 거의 완전히 파악되어 있다.

 
《 이름(본명): 김일성 (金日成) 때에 따라 날 일자를 - 로 쓰기도함.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이다.

연경: 26세.    출생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무장투쟁 투신과정: 1929년 길림에서 6개월 복역  그 후

☆☆  [ 관련 사료는 맨 하단에 있음 ]

 
1932년 4월에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장백산맥과 송화강 유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이라는거 전개하였고, 1936년에 중국공산당 지도하에 있는 항일유격부대와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 제1로 2군의 지휘간부로 활동하였다.

제2군은 주로 조선사람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도 하였음.  1936년에는 통일전선 조직이며 지하혁명 조직인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를 조직하고 ‘10대 강령’을 발표, 국내에 광복회 지하조직망을 구축하는 공작을 전개함,  1937년 6월 국내조직과 연계하여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의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함.

과거 일각의 ‘가짜 김일성’ 논란에 대한 명확한 반론의 증거가 되고 있다.

혜산사건이 종료된 후 함경남도 국경지방 항일조직과 만주항일무장투쟁 세력과의 연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한편, 이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박금철·이송운(李松雲)·허학송(許鶴松) 등 대부분의 인물들은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여 북한체제건설과정에 중요한 자원으로 참여하였으나, 1967년 이른바 ‘갑산계사건(甲山系事件)’으로 대부분숙청되었다.

사건의 배경과 판결 결과, 그것의 파장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사건은 일제시대 항일조직사건 중 국내외 조직이 대규모로 연결된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다.

 
(혜산 사건 판결문 원문)














어쨌든~^^ 독립운동가 ~^ "박달"

1945년 8월15일 광복 직후 서대문형무소에서 하반신이 마비된 채 업혀서 나온 독립투사가 있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김일성부대=동북항일연군 2군 6사)와 연계를 맺고 1930년대 
중반 이후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이던 '조국광복회'의 국내 지역조직으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만들고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에 합세한 박달이 바로 그다. 

 
항일빨치산의 국내 진공을 당한 일제는 이른바 ‘혜산 사건’을 조작해 739명을 검거하고 188명을 구속했다. 박달도 수배 중에 친일경찰 최연에게 체포되고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으나 일제의 야수 같은 고문으로 결국 일어나 걷지 못하는 몸으로 광복을 맞았다.

 
●  축구회부터 어용단체까지 활용, 일제의 경계 허물기


박달은 1910년 10월28일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문상(朴文湘)이다. 부친은 길주 바로 옆의 동해안 북부 명천에서 정어리공장을 운영했는데 박달을 상급학교에 보내지 않고 보통학교 졸업 후 16세 때부터 이 공장의 회계를 맡아 보게 했다. 


그러나 박달은 독학으로 중학 강의록을 다 읽고 1920년대 신사조와 관련한 많은 서적을 탐독했다. 또 그는 11세 때 조혼했는데, 다섯 살 많은 아내에게 한평생 변함없는 순정을 바쳤다. 첩을 둔 아버지로 인해 고독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안타깝게 지켜봤기에 더욱 그랬다고 한다.

박달은 명천소년회에 참여하면서 사회활동을 시작했고 20세 무렵 갑산군으로 이주해 갑산청년동맹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35년에는 박금철·이효순·허학성 등과 함께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했다. 당시 갑산지역의 일부 사회운동자들은 일제의 폭압에 겁을 먹고 투항주의적 태도를 보였는데, 박달은 혁명에서 도피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갑산의 자발적 운동을 조직화해야 하고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갑산공작위원회를 보호하기 위해 하부조직 명칭을 일부러 정우회·전진회·반일회 등으로 지었다. 진흥회·자위단 등 어용단체들도 활용했다. 이런 간판으로 야학회·운동회·축구회 등을 개최해 일경의 주목을 따돌리고 대중계몽을 추진했다. 월 1회 갑산공작위원회 회의도 축구대회에서 했고 회원모임도 제사·결혼·생일·환갑잔치에서 가졌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의 폭압적 현실에서 합법 활동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제 경찰, 친일 주구들과의 관계를 좋게 하고 어용단체·말단행정기관에 들어가 활동했다.

 
갑산공작위원회 총책임자 겸 정치부 책임자를 맡은 박달 자신이 직접 보천면 신흥리 1구의 농촌진흥회 부회장, 자위단 부단장, 운흥면 소방수 등 주요 자리를 차지하여 일제의 경계를 늦추고 정보를 취득하며 동조자를 포섭했다. 훗날 혜산 사건 1차 구속자 중 63명이 자위단원이었을 정도로 합법-비합법을 결합해 농촌의 실정에 맞는 소작료 인하, 화전 자유 개간, 부역 반대, 고리대 반대, 아마 강제재배 반대 등의 요구와 투쟁을 힘 있게 벌였다.

 
●  김일성을 만나다

 
1936년 5월5일 동강회의의 조국광복회 결성 이후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 2군 6사) 사령 김일성은 선전과장-조직과장 권영벽을 파견해 1936년 10월 장백현에서 최초의 조국광복회 조직인 20도구 신흥촌지회(지회장 이제순)를 결성했다. 다시 이제순이 조국광복회 국내조직화 최적임자로 추천한 박달을 만나기 위해 권영벽은 김일성의 편지를 간직한 채 그해 12월 압록강을 건넜다. 이제순도 동행했다. 권영벽을 통해 박달에게 보낸 김일성의 편지는 아래와 같다.

 
“조국을 사랑하며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국내의 애국자동무들 앞


" 국내에서 간악한 일제 원수들과 싸우는 동무들! 우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무장을 들고 만주광야에서 일만군경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무들과 손을 굳게 잡고 모든 힘을 합쳐서 일제를 반대하며 조국을 광복시키는 투쟁을 진행할 것을 충심으로부터 권합니다. 나는 우리의 대표를 직접 동무들에게 파견하오니 서로 만나서 사심 없는 토론들을 교환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달은 권영벽을 통해 조선인민혁명군의 주요 활동과 조국광복회 창립 소식을 전해 듣고 김일성 사령의 편지를 읽은 다음 기뻐하며 즉시 만나게 해 달라, 언제든지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순이 박달을 데리고 백두산 밀령으로 가서 김일성을 처음으로 만났다. 논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으로서 조국광복회 국내 지역조직 건설과 국내당공작위원회를 통한 당 조직 건설에 집중됐다.

 
☆☆☆  박달의 질문과 김일성의 답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 여기서 "박"은 박달이고 "김"은 김일성을 뜻한다.

 
“박 : 조선인민혁명군은 중국군대가 아닌가?

김 : 자주성과 독자성이 보장되는 항일연합군이다. 중국사람들이 많은 동네에서는 항일연군으로, 조선사람들이 많은 동네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이름으로 활동한다.

박 : 조국광복회에 최고강령이 왜 없는가? 민족주의로 후퇴한 것 아닌가?

김 : 조선독립은 공산주의자들만으로 안 된다. 각계각층의 모든 역량을 묶어 세워야 한다. 조선독립 없는 공산주의가 가능하지 않다. 적색을 내세워 단결을 저해하면 안 된다.

박 : 당 조직을 건설하면 국제당에 승인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김 : 마르크스·레닌은 누구의 승인을 받고 당 조직을 건설했나? 당 중앙이 건설될 때까지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국내당공작위원회를 통해 기층 당 조직을 건설하고 통일적으로 지도한다.

박 : 당 조직을 먼저 건설해야 하나? 대중단체를 먼저 건설해야 하나?

김 : 당원의 준비에 따라 당 조직 먼저, 또는 대중단체 먼저 건설할 수 있다. 준비된 당원이 3명만 돼도 당 조직을 먼저 만든 후 대중단체를 건설할 수 있다. 준비된 당원이 1명이면 대중단체를 먼저 만들어 그 속에서 당원들을 육성해 당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그 결과 조선인민혁명군 당 위원회의 국내 전권대표이자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으로서 1937년 1월 박달의 사회로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채택했다. 산하에 항일청년동맹·반일그룹·농민조합·반일정우회 등 35개 단체가 조직됐다. 

갑산·혜산·삼수 등의 백두산 주변 접경지역, 무산·성진·길주 등 함북의 조중 국경지역, 함남 함주·함흥·풍산·단천·흥남·원산, 평북 명천·신의주와 압록강 중류 방면의 동흥·후창 등에도 조직사업이 이뤄졌다.


●  민중에게 자신감 안겨 준 보천보 전투

 
1937년 5월 박달은 김일성을 또 찾아가 만났다. 김일성은 일제가 머지않아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전제 아래 국내 혁명가들이 조성된 정세를 잘 이용하면서 반일투쟁을 적극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천보 시가의 약도를 그리고 일제의 국경경비를 상세히 조사해 보고하는 특별과업을 주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갑산공작위원회의 협력으로 1937년 6월3일 밤 압록강을 건너 이튿날 정각 10시 지휘처의 권총 발사를 신호로 보천보 전투를 개시해 승리로 이끌었다. 혜산진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보천보의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 등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며 반일연설 이후 신속히 퇴각했다.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국내 주요신문과 세계 각국의 언론들이 일제히 보천보 전투 소식을 전했다. 일제가 1936년 12월 노동운동가 이재유 체포를 대서특필해 더 기죽어 있는 노동자·민중들에게 조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보여줬고 싸우면 반드시 독립과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줬다.

1937년 7월7일 중일전쟁을 통한 중국본토 침략 코앞에서 보천보 전투로 급소를 찔린 일제는 혜산·장백 일대에서 그해 10월부터 대규모 검거에 나섰다. 1938년 7월 시작된 2차 검거까지 공식 발표만으로 무려 739명이 붙잡혔다. 

권영벽도 10월10일 혜산에서 석유를 구입하다가 일찍이 체포됐다. 일제는 박달 등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핵심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혜산경찰서의 조선인 경부 최연이 사복경관·자위단·소방대까지 다 끌어내 박달의 뒤를 추적했다.

1차 검거 선풍 속에서 박달은 다행히 몸을 피했다. 함경남도의 평야 지대와 각 지역의 노동시장에서 활동하면서 겨울을 넘긴 뒤 1938년 4월 하순 갑산군에 있는 산중 아지트로 돌아와 검거되지 않은 회원들을 다시 모아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조국광복회에 대한 일제의 2차 검거가 시작되자 6월 초 장백현 19도구로 강을 건너 다시 피신한다. 같은해 8월20일 아지트로 돌아와 머물러 있던 중 그만 체포됐다. 2차 검거로 구속된 관계자는 279명이었다

박달과 김철억은 김철억의 사촌형 김창영의 변절로 1938년 9월과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는 박달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을 했다. 심문의 초점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위치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성원명단이었다. 척추가 부러지고 다리뼈가 부서졌다. 그러나 그 어떤 고문과 악형도 박달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처음에 사형을 선고했다가 증거 부족으로 무기징역으로 바뀌었다.

박달은 만 7년의 옥고를 이겨 내고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 권영벽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선전과장-조직과장, 이제순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 위원장이 1945년 3월10일 오후 4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최후를 마친 지 155일 만이다. 

 
박달이 아내의 간호를 받으며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하고 있는데, 김일성이 북조선임시인민위사무국장을 보내 평양으로 데리고 갔다. 자신의 집옆에 박달의 집을 잡아 주고 그를 소생시키기 위한치료대책을 세웠다. 전쟁 이후에는 주을휴양소에 ‘박달각’을 따로 지어 그를 치료해 줬다.

박달은 아내 현금선과 의사들의 협조로 수기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 자서전적 장편소설 <서광>을 쓰기 시작했다. 수많은 독자들이 독후감과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고무돼 여러 편의 글을 더 써 냈다. 

그러나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돼 1960년 4월1일 운명했다. 박달의 집에서 전례가 없는 조선노동당 중앙위 정치국회의를 열고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결정했으며, 당시 김일성 수상이 직접 박달의 관을 메고 운구했다. 박달이 해방 전에 거주하던 보천군 운흥리 집을 원상태로 복구하고 집 앞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박달은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 4번째 단상에 안치돼 있다.


한편 이 보천보 전투 및 혜산사건 재판으로 이 사건의 수사와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김일성의 신원도분명해졌다. ≪사상휘보 思想彙報≫ 제20호에 실린 혜산사건 보고 부문에는 김일성에 관한 본명, 나이, 출생지, 항일무장투쟁 투신과정 등의 경력이(사료)자료로 거의 완전히 파악되어 있다.

 
기록에는...

 
《 이름(본명): 김일성 (金日成) 때에 따라 날 일자를 - 로 쓰기도함.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이다. 연경: 26세.    출생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무장투쟁 투신과정: 1929년 길림에서 6개월 복역  그 후 》


이 사건의 배경과 판결 결과, 그것의 파장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사건은 일제시대 항일조직사건 중 국내외 조직이 대규모로 연결된 매우 특별한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과거 일각의 ‘가짜 김일성’ 논란에 대한명확한 반론의 증거가 되고 있다.


☆☆☆  이 사건의  역사적 증거,증명 (사료)자료  아래...


(혜산 사건 판결문 원문)













● 《 혜산사건 판결문 복사본 》












이상...

김일성 가짜설의 미스테리..3 (마지막편)

03편.         (마지막편)


오기섭이 한때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이 일제강점기때 저명한 항일 투사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라고 주장한 설이 있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의 평양 연설 이후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군사정권의 반공 통치가 강화된 60년말부터 반공 성향의 학자나 언론인 등에 의해 퍼지기 시작해, 심지어 당시의 아동/청소년용 반공 교육서적이나 반공정신 함양매체(동화,소설,만화 등)에서 버젓히 통용될 정도로 한때 남한 사회에서 꽤 널리 통용되었으나, 더 이상의 증언이나 자료가 없어서 현재는 하나의 학설 이상의 진전은 없는 상태이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는데, 이 '가짜설'은 남한 우익진영에서만 제기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익에 의해 체계적으로 퍼뜨려진 것도 아닌, 그가 평양에서 처음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북한 주민들과 남한의 조선공산당 그리고 우익 진영 등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던 것이 그 기원이다.

만일 이 설이 우익이 김일성을 비난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박헌영
과 여운형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굳이 가짜론을 만들 필요도 없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설의 악용은 어디까지나 '원래 있던 것'을 원용한 것이다.

 

●  그렇다면  시초에는.!!

 

김일성 가짜설의 시작은 김일성이 백발노장이라는 소문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국내에 거주하던 사람들에게 김일성의 항일투쟁 소문이 퍼지면서 시작된 것인데, 당시 한국 사람들의 기본적인 정서는 장군이라고 하면 백발이 성성한 지식과 내공충만한 중년 이후의 남정네를 먼저 떠올리곤 했다(이는 과거 구한말 때 교육된 위인전의 영향이 크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김일성도 을지문덕이나 강감찬 같은 이미지의 장군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당시 항일 투쟁은 장기화되면서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 투쟁을 지속하던 노령의 인사들은 여러 이유로 세상을 떠나는 상황이었고,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협력을 얻어 항일 투쟁을 전개하려는 젊은 층들이 항일 무장 투쟁의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의거해서 중국공산당
에 입당하거나, 아니면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단체에 대규모로 참여해서 활동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 갑자기 '중국공산당 내에 조선인 간첩이 있다'라는 괴소문이 대거 유포되면서

※ (참조) 《 이것은 항일무장투쟁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일제의 공작으로 추정된다.》

 

공산당 내 조선인 간부가 대숙청(+ '일제의 간첩' 조선인 자체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소위 민생단 사건이 발생하였다. 중국공산당 만주 지역간부들에 의한 조선인 숙청은 근 3년간 지속되면서 만주에서 중국인들과 함께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조선인 간부들과 인텔리들의 상당수가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중년 이상 고령의 간부들은 싸그리 희생당하고 중국과 합작해 활동하던 조선인 부대들이 내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인 숙청을 과오라고 규정한 중국공산당 중앙지도부의 지시에 따라서 상황은 종결되었고, 남아있는 조선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살아남은 20~30대의 젊은 층들을 초고속으로 진급시키게 된다.

만주 공산당 내 조선인 세력 사이에서 젊은 층이 지도부로 등장하게 된 것인데, 당시 30대 초반인 김책, 최용건과 20대 후반의 김일성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로 조선 내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1930~4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 투쟁은 상황이 매우 열악해서 노령의 인사들이 나이와 건강상 버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1930년대 일제가 만주를 침탈하고 만주국을 세운 이례로 거점없이 떠돌아 다니며 노숙도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특히 겨울 혹한의 만주에서는 노령의 독립운동가가 현장에서 활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실제로 무장독립운동가들의 수명을 보면 미국, 유럽같으면 2차대전기에 고급지휘관으로 활동하고 1950~60년대까지는 족히 살아있었을 1880~90년대생들이 1930~40년대쯤에 병사, 전사, 암살 등으로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인 지청천 장군이 광복 후 50년대까지도 정치인으로 활동한 것이 매우 특이한 사례일 정도다.

 

그리고 해방 이후 김일성이 평양에서 한 최초의 연설(1945년 10월 14일) 때 평양시민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와 다른 젊은 김일성을 만나게 되었고(당시 김일성은 33세), 이런 이유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의혹이 남한에서 공식적으로 가짜론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흔히들 70년대를 그 기원으로 보지만 김일성 가짜설은 40년대 후반 대북 전단이나 대북 선전에도 버젓히 나오던 이야기. 

 

다만 후술하게 될 김일성 가짜설의 정교한 이론화는 유신정권 이후로 시작되었다고 보면 된다. 사실 60년대 문교부(현 교육부) 공식 서적에는 버젓히 "김일성은 약간의 반일활동은 했지만 그 범위는 크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사실 해방을 전후해서 김일성이 과연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독립운동가 김일성인가에 대한 회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계속 일고 있었다고 하다. 

일단 이름 한자부터 달랐다(또 다른 독립운동가 김일성은 金一聖, 북한의 김일성은 金日成). 해방 직후 미 군정도 김일성(김성주)은 그 이전의 독립운동가인 '김일성'(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 활동하던 김경천이 대표적)이 존재했고 김일성(김성주)은 그의 이름을 빌려서 사용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참조) 《 이설은 해외까지 알려져서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동아총통특무대》에서는 소련NKVD(내무인민위원회)가 '라브렌티 베리야'의 명을 받고 진짜 김일성을 처형하고 김성주를 다음 김일성으로 세운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

다만 김일성이 아주 유명한 인물도 아니고 김일성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일본경찰의 첩보에 의존하였고 그 첩보는 프락치가 없는 이상 대부분 용의자 심문이나 조선인들에 의한 소문에 의존했기 때문에 일본의 초기자료는 한자가 다른 김일성이나 오타로 '김일선' 까지 나왔고 그것이 김성주의 가명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후대의 연구자들로서는 이것이 서로 다른 사람인지, 동일인인지 어려운 일. 다만 김일성이 소련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일본 경찰도 김일성의 정체에 대해서 확실히 알았었고 이때의 자료를 보면 우리가 아는 북한의 김일성임이 확실히 파악된다.

※ (참조) 《  
중국과 일본은 한국인 인명을 한자로 적다보니 이런 식의 오기는 지금도 터진다. 곧바로 한자 표기를 알 수 있으면 괜찮은데 소리로만 이름을 듣고 기록하려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리설주'의 등장 직후 중국 측에서 그녀의 한자 표기를 몰라 임시방편으로 여러 표기를 동원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나마 일본은 불완전하나마 가나 표기라도 있지만 중국은 정말 답이 없는 수준. 순우리말 이름
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일, 중, 대만과 교류가 많을 경우에는 일부러 한자 표기를 만들어 쓰기도 한다. 》



이러한 김일성 가짜론의 정교한 이론은 재일교포 학자 '허동찬'의 이론인데, 허동찬은 일제 심문 조서등에 나오는 한문 다른 김일성과 김일센 등에 따라서 적어도 두명 정도의 김일성이 있었다고 봤지만 앞서 말한대로 30년대 후반의 일제 첩보 자료 연구 결과 자신의 이론을 철회하고 김일성이 진짜임을 인정한다.


※ (참조) 《  
물론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30년대 자료를 고의로 무시한다. 》


          이상...     끝



김일성 가짜설의 미스테리..2

02편


월남민 1세대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오늘날 학계와 일반에는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어, 월남민들이 남긴 가짜 증언은 깡그리 무시되고, 그들은 항일 영웅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짜로 몬 멍청이 쯤으로 치부된다. 선배세대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냥 잊혀졌으면 그뿐인 별 대단할 것도 없는 인물이 스탈린과 소련군 덕분에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50년가까이 절대 권력을 유지하다 일족이 세습하는 체제로 만들어 놓다보니 그의 진위는 물론이고 세세한 행적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  북한 지역에도 퍼졌던 김일성 가짜설

 

함경북도 도민회장을 지낸 김허남(1920~)은 해방 직후 김일성이 처음 대중앞에 나서는 평양의 집회에 참석했는데, 아무리 봐도 자신이 소학교때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과 나이가 맞지 않아 북한 김일성 측에서 일하던 친척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가 살고싶으면 그런 말을 꺼내지 말라는 협박을 당했다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언론자유가 없는 김일성 치하의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면 아래로 잠복하였지만, 단편적으로 이를 거론한 사례는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조) 《 고준석 저  정범구 역》《해방 1945~1950》-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 pp. 220~221 : 고준석이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러 평양에 갔을 때 가까운 옛 동지 임해(1900~1962)에게 이북 지도자들에 관해 알려달라고 하자 임해가 해줬다는 말 : "박헌영" 파인 오기섭(1903~*)이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기비판을 했습니다. 그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였던 당시부터 분파주의 활동을 하여 김일성 동지를 가짜라고 하는 문서를 당 하부조직에까지 유포했던 것입니다..."》

 

※(참조) 《 1958년 소련으로 망명한 북한 유학생 김종훈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김일성은 가짜"이고, 살인 방조자이며 전범이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고 증언

(심층취재) 소련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6.25전쟁 진실 안 뒤 반감 싹터" VOA 2017.8.4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RFA 2016-12-27 》

 

※(참조) 《  유성철 (1917~1995)회고록 - "피바다의 비화" pp.22~23 -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 미의회도서관) : 유성철은 소련군 88여단의 김일성 대대 통역관으로 있었으며, 해방 후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내다 소련파 숙청 때 소련으로 돌아 갔다 》

 

또 소련군 문서에는 1946년 3월 5일 시행된 토지개혁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황해도 사리원시와 안악군에서 김일성이 가짜라는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고 나온다.

※(참조) 《 1946년 3월25일 
토지개혁사업 시행 및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총결보고 : 북한 소련군정 이그나티예프 대좌가 작성한 보고서 》

 

※(참조) 《  1946년 8월  황해도 소련군사령부 대표 및 경무사령부 사업보고 황해도 경무사령관이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에게 올린 보고서 》

 

소련의 고려인으로 북한 외무성 부상을 지내다 소련파 숙청 때 소련으로 돌아간 박길용은 해방 후 1945년 10월 중순 그가 처음 북한에 왔을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북한에서 외무성 부상을 지내다 59년말 소련파로 몰려 자진귀국형식으로 소련으로 되돌아가 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으로 있는 박길용 박사(73·모스크바시)의 증언.

 

『북한정권에 참여,김일성을 도우라는 소련정부의 지시를 받고 평양에 도착하니 「김일성 장군」이 소련군에 의해 인민들에게 애국투사로 부상되어 있더군요.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민족민주진영·기독계 인사·젊은층 등의 소비예트화 거부와 가짜 김일성에 대한 반발 움직임이 만만치 않더군요. 도착과 동시에 나는 소련 25군 정치사령부에서 통역 및 내근요원을 맡았기 때문에 당시 북한정세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지요.

소련군 수뇌부는 조만식 선생을 끌어들이는데 안간힘을 쏟았지요. 그러나 조만식 선생은 자신의 민족·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많은 지식인들과 지주·청년층이 그를 추앙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소련군 지도부는 소련정부에 공산당 조직과 정치행정경험이 있는 소련의 한인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요. 이 그룹이 바로 소련파 제3진에 해당됩니다.』

 

뿐만 아니라 평양 소련군정 장교 출신자들 중에도 후일 구소련 붕괴 후 인터뷰에서 북한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고 증언한 사람이 다수 있다.(구체적 사례는 아래에 나온다.)

 

●  김일성 가짜설에 대한 연구

 

초기의 김일성 가짜설은 북한 김일성이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정도의 의미로 확산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도 북한 김일성의 실제 전력이나, 진짜 김일성 장군이 어떤 사람인가 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고, 단편적인 주장만 몇가지 나왔을 뿐이다.

당시는 전후 복구에 바쁜데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가난하던 시절이라 김일성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엄두를 못낼 상황이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김일성에 대해 본격적인 심층적 연구를 한 사람은 이명영
(李命英, 1928 ~ 2000),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허동찬(許東粲, 1932~ ) 등이다.

 

이명영은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일제시대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에 대한 많은 월남민들의 증언을 듣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는데,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김일성 장군의 풍문이 있었으며, 1920년대 초에는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참조) 《  이명영(李命英), 『김일성열전(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新文化社, 1974) : 第一章 옛「김일성 장군」의 傳說과 正體 》

 

사람마다 증언하는 내용이 다양하여 김일성 장군을 실존인물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김일성 장군 전설의 원형이 되는 인물로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신 의병장 김일성 (金一成, 1888 ~ 1926)과, 일본 육사 나오고 백마타고 다녔다는 김일성 장군에 해당하는 인물로 김광서(金光瑞, 1888 ~ 1942) 장군을 들었다.

 

 또 북한 김일성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1937년 6월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의 2군 6사장 김일성은 그 해 11월 13일 전사했다고 밝히고, 그 후에 나오는 제2방면 군장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 김일성이 유격대에 투신하기 전의 행적도 그의 창덕학교 동창이나 만주에서 그를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상당 부분 밝혔다.

다만 김일성이 1932년 유격대 투신한 후부터 북한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의 실제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밝히지 못했는데, 그 시기의 일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자료 입수가 어려웠던 탓으로 보인다.

1970년대에는 일제시대 문헌에 대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무슨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도 어려웠고, 국교도 없던 중공이나 소련의 문헌은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김창순, 허동찬 등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연구 논문이나 저서를 다수 남겼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이명영과 다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이상..     03편에서 계속~~




김일성 가짜설의 미스테리..1

김일성 가짜설은 해방 후 소련군이 데려온 북한 김일성(金日成)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 대중앞에 나선 당시 나이가 33세로 너무 젊어서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 사이에 가짜라는 소동이 벌어지면서 처음 대두되었다.

 

이후 김일성 가짜설은 수많은 월남민들에 의해 남한 사회에 널리 퍼져 당연한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 일찌기 김일성 장군 소문을 듣고 자라 직관적으로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고 알았던 월남민 1세대 대다수가 작고하거나 퇴장할 무렵부터 김일성은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주장이 나와 점점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금도 진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   김일성 가짜설의 기원은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 장군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서던 날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다. 


※(참조) 《  김일성 환영대회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년 09월 05일 /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p.84~90 》

※ (참조) 《  유성철 (1917~1995) 회고록 " 피바다의 비화 " pp.22~23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 미의회 도서관 ) : 유성철은 소련군 88여단의 김일성 대대 통역관으로 있었으며, 해방 후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내다 소련파 숙청 때 소련으로 돌아 갔다. 》


※ (참조) 《  장준익(張浚翼), ≪북한인민군대사(北韓人民軍隊史)≫ (서문당, 1991년 11월 1일) p.40 : 저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 역임함. 》

 

※ (참조) 《  한재덕 1911~1970 김일성을 (고발)한다. 1962.05.12 동아일보 2면 / (김일성을 (고발)한다.(1962.05.13 동아일보 2면 / (김일성)을(고발)한다.(11)회 1962.05.14 동아일보 2면 》


군중들의 태반은 김일성보다 나이가 연상이었을텐데, 당시 33세이던 북한 김일성은 나이로 보아 그들이 어릴 때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왔던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집회 참석자들이 쉽게 간파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오랜 외국 생활로 연설하면서 한국말을 심하게 더듬거렸고 


 (참조) 《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 사상을 가르
친 박일(朴一) 전 김일성대 부총장은 김일성이 주로 중국에서 빨치산활동을 한 탓인지 사물을 판단하는 데 우선 중국어로 궁리하는 습관이 있어 교육에 애로가 많았으며,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차 분간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김일성 정권 수립앞서 ML 학습/당시김일성 대 부총장(박일)씨가 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 김일성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


※ (참조) 《  김일성 폭탄투척 극적 목숨건져   연합뉴스 1991-08-14 (레오니드 바신이 시사 월간지 ‘소베르센노 세크레트노’(極秘)에 기고한 ‘대위동무’라는 글의 내용) : 조선인 출신 소련군 장교들은 김의 조선어 지식이 매우 부족한 반면 중국어는 꽤 알고 있는 편이라고 말했는데 이 때문에 상황에 적절한 연설문 작성에 애를 먹었다. 》

 

그의 본명이 김일성 아닌 김성주라는 것이 알려진 것도 그가 가짜라는 확신을 더하게 했다.


20210206141523_bcwvxnuu.jpg        ☆ 파란 영문 클릭하면 관련 사진이 나옴.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 대위(Капитан Цзин Жи-чен)"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그가 너무 젊었기 때문에 가짜 소동이 일어났다. 뒷줄 소련군 장성들은 맨 오른 쪽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상장이다. 


레베데프는 당시 무명의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 민족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 했다고 1991년에 증언했다. 


※ (참조) 《  김일성 외교비사 (박길룡, 김국후,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룡 1920~ 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 는 한소 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김일성 왼편은 강미하일 소련군 소좌 》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데려와 지도자로 내세운 김일성은 어려서 만주로 가 거기서 성장했고, 만주와 소련에서 활동하여 국내에는 연고가 거의 없는 낯선 사람이었으니 대중들은 해방 전 그가 어디서 무얼 했는지, 실제 이름이 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1920년 무렵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도 만나본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두 사람의 나이가 맞지 않아 동일인이 될 수 없다는 것만은 자명했다. 이후 많은 월남민들에 의해 그가 가짜라는 말이 남한 사회에 널리 퍼져 사실로 인식되었다.

 

북한 김일성에 대해 가짜 논란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은 아무도 본적이 없는 생소한 인물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행적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된 오늘날에도 베일에 가려진 부분도 많고, 진위 논쟁조차 선명히 가려지지 않고 있는데 해방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귀국한 이승만, 김구 같은 분들을 두고는 진위논란이 벌어질 여지가 없었지만, 김성주가 사칭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명성과 달리 실체가 애매한 이름이었던것도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실체가 분명한 사람을 함부로 사칭할 수는 없으므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실체가 애매했기 때문에 북한 김일성이 그 이름을 사칭할 수 있었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해방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하던 북한 김일성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어릴 때부터 아는 익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북한이 수십년간 지속적으로 선전해온 조작된 김일성 경력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어간 반면에,

일제시대 어릴 때부터 김일성 
장군 이름을 듣고 자랐던 월남민 1세대들은 점차 

세상을 떠나고 전설적 김일성 장군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새로운 세대들이 주축이 되니 김일성 가짜설은 힘을 잃고 진짜설이 힘을 얻게 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는 북한 김일성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으므로, 해방전에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일 조차 없고,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것이 점차 밝혀져 마치 독립운동을 한 영웅이 맞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그의 본명은 김성주이지만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진짜가 맞다고 주장할 빌미가 마련된 것도 진짜설이 힘을 얻는 배경이 되었다.

 

     

이상..       0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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