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빨이 순경은 '꿀꿀'

●  26살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든 보천보전투… 전과 미미했지만 강력한 충격타를 날리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한달여 전에 있었던 1937년 6월4일의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만든 사건이다. 과연 이 전투는 얼마나 큰 전투였기에 26살의 젊은 김일성을 당대의 영웅으로 만들었을까? 이북이 자랑하는 이 “위대한” 전투에서 조선인 유격대는 일본군경을 얼마나 살상하였을까?

 

6월4일 당일의 보천보전투에서 적 두명이 죽고, 당시 일본군이 200만명에 달했던 것을 고려하면 순수한 군사적 의미에서 보천보전투는 일본제국주의의 터럭끝도 다치게 하지 못한 전투였다. 그런 보천보전투가 왜 김일성에게 엄청난 명성을 안겨다 주었을까?

 

 


◇  조-중 공동항일전선의 확고한 부활

 

 


보천보전투의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군사적으로 강점한 이후 조선 내의 민족해방운동은 침체일로에 빠져들었다. 먼저 만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우리 독립군은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당시 중국공산당은 조선인 당원들이 조선혁명을 위해 싸우는 것을 중국혁명 역량의 분산으로 보고 억압하였다. 따라서 1930년대 전반기에 만주, 특히 간도는 국내 독립운동을 고무하던 책원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신간회의 해소 이후 국내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일제의 막강한 물리력, 일제 자신이 선전한 대로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뻗어가는 일제의 힘에 압도되어 독립의 희망을 잃고 친일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보천보전투 직전인 1937년 5월에는 국내 공산주의 운동 최고의 거물로 일제에 여섯번 체포되어 여섯번 탈출했다는 신화를 남긴 이재유(李載裕)가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를 두고 조선공산주의운동이 이제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연이은 패배 속에서 대중은 승리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만주의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도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우겠다는 그들의 결의를 억누르던 중국공산당의 잘못된 방침이 민생단사건의 종식으로 바뀌게 되자 국내 진공을 모색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북만으로부터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국경지대의 장백(長白)으로 진출하여 새로이 부대를 편성하고 국내 진공을 준비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보천보전투가 김일성 부대 또는 조선인 부대만의 단독작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물론 보천보를 들이친 것은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련군 2군6사였지만, 이 전투를 위해 1군2사와 2군4사 등 2개 사단이 배합작전을 펼친 것이다. 보천보전투는 만주의 항일운동에서는 파탄 직전에까지 갔던 조-중 민중간의 공동항일전선의 확고한 부활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유격대원들에게 보천보 진공은 오랫동안 헤어진 어머니 조국과의 감격적인 재상봉이었다. 기습작전을 마치고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대원들은 구령도 없이 흩어져 저마다 한움큼씩 흙을 주워 배낭에 넣었다고 한다. 만주에서 낳고 자란 항일투사들, 또는 어려서 만주로 건너간 유격대원들에게 조국이란 그렇게 그리운 것이었다.

보천보의 정식 지명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로 국경지대의 면사무소 소재지였다. 

 

이곳에는 일본군은 주둔하지 않았고, 경찰주재소에 6∼7명의 경찰관이 근무할 뿐이었다. 국내의 지하조직을 통해 그날 저녁 주재소 경찰들이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은 소장의 환송연을 벌여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라는 정보까지 파악하는 등, 마을의 사정을 손금보듯 알고 있던 김일성 부대에 보천보전투는 너무 일방적으로 쉽게 끝나 아쉬운 전투였다. 중무장한 100여명의 유격대가 술에 전 경관 6∼7명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어찌 유격대라 할 수 있겠는가?

 

 


◇  패배주의에 빠진 대중에게 희망을!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준비하면서 노린 것은 완벽한 승리였다. 김일성은 이 국내 진공작전을 통해 일제의 막강한 힘에 압도당해 있던 조선의 대중에게 일본제국주의자가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제도 칼로 내리치면 동강이 나고, 불을 지르면 타버리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김일성은 부하들에게 “군대가 싸움을 잘하면 민중의 배짱이 커진다”면서 “국내에 들어가 총 몇방만 뚱땅거려도 대중의 활동이 한결 수월해진다”고 훈시했다. 

 

일제의 관헌자료도 이 사건에서 김일성이 노린 것이 “항일련군의 위력을 조선 민중에게 주지시키고 혁명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인정했다.

 

김일성은 유격대의 힘만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억눌린 조선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길은 전 민족이 항일투쟁의 길에 다 떨쳐일어나 일제의 통치를 마비시키는 길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대중은 독립운동 진영의 거듭된 패배와 일제의 기세에 눌려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때 김일성은 보천보 진공작전을 통해 “조선은 죽지 않았다, 조선은 살아 있다!”고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김일성이 이 전투를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은 몇몇 일본군을 잡는 것이나 국경지대의 작은 도시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이 원했던 것은 패배주의에 빠진 대중에게 독립의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군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내세울 만한 전과를 거두지 못한 보천보전투를 이북의 역사가들은 물론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큰 충격으로 받아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사실 전과의 면에서 본다면 김일성 부대가 추격해온 일본 경찰대를 궤멸시킨 구시산전투나 일본군 74연대에 대승을 거둔 6월30일의 간삼봉전투가 훨씬 더 큰 전과를 거둔 전투였다. 그렇지만 정치적 의미에서 보천보전투는 유격대의 총알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유격대의 존재를 알린 대사건이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 독립군의 활동이 희미한 옛 기억으로 사라져가던 시기에 홀연히 나타난 김일성 부대의 총성은 그뒤 반세기가 넘게 우리 역사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김일성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조선중앙일보> 폐간 이후 술도 끊고 울적한 심사를 달래던 여운형은 주위 사람들을 불러 밤새 술을 먹고는 다음날 보천보 현장으로 달려가 직접 눈으로 일제의 패배를 확인했다. 보천보전투 이후 아이들의 전쟁놀이 양상이 변했다고 한다. 보천보에서 멀지 않은 곳이 고향인 최익환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쪽이 김일성군이 되고 지는 쪽이 일본군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44년 11월 평양사단에 징집된 학병들이 탈출을 준비했을 때 그들의 목적지는 보천보였다. 불행히 실패로 끝난 이 학병탈출사건의 지도부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천보로 가려 했다는 사실은 보천보전투가 조선의 대중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보천보전투 이후 갑산 지방에 널리 퍼진 노래에 <순사돼지 꿀꿀>이란 것이 있다. 유격대의 기습에 혼비백산한 일본 경찰 하나가 돼지우리에 숨었고, 유격대가 퇴각한 뒤에 마을 주민들이 다가가도 겁에 질린 채 돼지인 척 꿀꿀댔다는 것을 풍자한 노래이다. 일제의 경찰이란 식민지 민중이 삶의 현장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식민지 권력기구의 최말단이다. 경찰이나 산림간수는 비록 직급은 낮을지 몰라도 일반 대중이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총독부 권력의 실체였다. 따라서 이들이 대중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은 해당 관헌 개인의 위신문제만이 아니었다. 

 

보천보사건 이후 순사들은 유격대를 겁내 밤에는 나다니지도 못했고, 함경도 일대의 산림주사와 간수들이 “보통 때는 극성스럽게 산으로 돌아다니며 화전민을 괴롭혔으나 보천보전투 뒤에는 산 근방에 얼씬거리지 못했기 때문에 화전민들이 그해에는 자유로이 화전을 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중은 권력관계의 변화에 민감했다. 농민들은 권력관계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변화한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면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저항형태에서 좀더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에게 도전하게 된다. 그 기세등등하던 일본경찰이 김일성 부대가 공격해오자 돼지우리에 숨어 돼지처럼 꿀꿀거렸다는 이야기를 통해 농민들은 일제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떨칠 수 있었고, 세상의 변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천보사건 직후 "조국광복회"나 "조선민족해방동맹"이 국경산악지대에서 놀라울 정도로 급속하게 조직을 확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동아일보> 양일천의 활약

 

 



보천보전투를 통해 김일성이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르는 데는 언론, 특히 <동아일보>의 공이 컸다. 1936년 여름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고,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받았는데,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 사흘 전인 1937년 6월1일치로 복간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무기정간을 당했다 풀려난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가 일어나자 신이 나서 두 차례나 호외를 발행해가며 연일 대서특필한 것이다. 

 

물론 보도에 사용한 언어는 “공비들의 살인, 방화, 약탈”이었지만.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독립운동을 폄하한 당시 신문들의 친일적 보도태도라고 비판하는데,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지하신문이 아닌 이상 합법적으로 발행되는 신문으로서의 한계는 인정해야 한다. 더구나 우리 민중은 아무리 합법신문들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재주가 있지 않았던가? 1998년 10월 김병관 당시 사장 등 동아일보 방북취재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물로 준 것은 바로 보천보전투의 기사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를 황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황금 호외 선물은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 8월 만경대 파문 당시 ‘오**뉴스’가 특종 보도하여 네티즌 사이에 큰 화제가 되었다. 이 황금 호외 선물은 <동아일보>쪽이 김일성의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된 데 자신들의 기여가 컸음을 이북의 지도부에 과시하려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유독 <동아일보>가 보천보전투를 대서특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동아일보>의 혜산진 주재기자로 보천보전투 보도에서 맹활약한 양일천(梁一泉)은 김일성의 '조국광복회' 조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인물이었다. 양일천은 김일성이 국내로 '조국광복회' 조직을 확대할 때 손을 잡은 천도교 지도자 박인진(朴寅鎭)의 제자였다

 

(비전향 장기수로서는 최초로 북송된 이인모 선생도 박인진의 제자였다). 양일천은 일본인 가와시마(河島)가 유격대 최현 부대에 생포되었다가 풀려나자 그를 인터뷰한 기사를 <동아일보>에 쓰기도 했다. 가와시마는 이 인터뷰에서 유격대는 ‘비적’이 아니라 공산군이며, 토벌대는 죽고 오지, 살아 돌아온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양일천이 쓴 또다른 주목해야 할 기사는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시인 김동환(金東煥)이 발행하던 당시 최고의 대중지인 <삼천리> 1937년 10월호에 실린 ‘국경의 비적 수괴 김일성 회견기’이다. 김일성 자신이 그의 회고록에서 “보도관제가 심한 때에 잡지 <삼천리>가 이런 정도의 기사를 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할 만큼 이 기사는 김일성에게 우호적이었다(이 기사는 1999년에 간행된 <한국근현대사연구> 10집에 재록되어 있다). 이 기사는 양일천이 직접 김일성을 인터뷰한 것이 아니고 김일성 부대에 ‘납캄되었던 김정부(金鼎富)라는 노인을 통해 김일성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김정부는 원래 독립군을 후원했던 애국지주로, 김일성은 장백현으로 나오면서 그를 포섭대상으로 점찍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부하들이 대지주인 김정부를 악질반동분자로 오해하고 그를 아들과 함께 유격대의 밀영으로 잡아온 것이다. 김일성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김정부를 만나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의사를 표하자 김정부 자신이 펄쩍 뛰며 자기가 밀영에 붙들려 있어야 집에서 몸값 명목으로 유격대에 원호물자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정부 자신은 밀영에 남고 아들만 풀려나게 되었다. 

 

김정부는 유격대의 밀영에 7개월여를 머무르며 설도 쇠고 유격대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푸짐한 생일상까지 받아먹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정부는 김일성 부대에 많은 돈과 쌀, 천을 보냈고, 김일성은 “항일혁명 전 기간 김정부와 같은 애국충정을 품고 그처럼 통이 크게 우리를 지원해준 대지주를 별로 보지 못했다”라고 그를 추억했다.

 

 



◇  대지주 김정부의 회고

 



이 보기드문 인터뷰에서 김정부는 김일성의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후리후리한 키, 우락부락한 말소리, 음성을 보아 고향은 평안도인 듯, 예상보다 연령은 너무나 젊은 혈기방장의 30미만의 청년. 그는 만주어에 정통, 어데까지 대장이란 표적이 없고 복장, 식음에까지 하졸(下卒)과 한가지로 기거를 같이하며 감고(甘苦)를 같이하는데 그 감화력과 포용력이 있는 듯하게 보였다.” 김일성은 “로인님, 추운 데서 얼마나 걱정되십니까” 하고 “부드러운 인사”를 드리고는 “우리 젊은 몸이 따뜻한 자리 평안한 생활을 누가 싫어하겠오. 2∼3끼씩 보리죽도 못얻어먹어가며 이 고생을 달게 하는 것은 다 그리되어 그런 것이요”라 말하고는 “나도 눈물이 있고 피도 있고 혼도 있는 인간이오.
 

 

그러나 이 추운 겨울을 우리는 이렇케 돌아다니는구려”라고 말했다고 김정부는 회상했다. 양일천은 이어 이렇게 썼다. “김일성! 비적수괴인 그는 골격이 여물어 보이고 말 잘하고 뱃심있어 보이는 그! 나이에 비해서 풍상을 겪은지라 노숙해 보이는 그! 그는 마적대장이라 자칭함이 그럴듯하더라고 김옹은 여러 번 말하였다.” 김일성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쓰던 양일천은 이 기사를 쓴 직후 혜산진사건이 일어나 김일성이 조직한 '조국광복회'의 지하조직원들이 검거될 때 체포되었다. 그는 박인진과 마찬가지로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상당 기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보천보전투 이후 김일성의 명성이 높아졌지만, 그의 유격활동이 순탄하게 발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공산당 산하의 항일유격대는 열하 지방으로 이동을 명령받았고, 김일성 부대 역시 이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틈을 타 일제는 김일성이 만주와 국내에 조직해놓은 항일대중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게 된다. 이 대검거 소식을 듣고 김일성 부대가 다시 국경지대로 돌아오는 과정이 유명한 ‘고난의 행군’이다. 그런데 김일성의 명성이 대중운동과 실질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와중에서 일제의 전시총동원으로 인해 대중의 처지가 바뀌게 되면서부터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를 달리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상..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