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 역사).. 김일성의 여자들.

***  김일성이 처는 몇명인가?
 
 
 
현재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김일성의 처는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金貞淑)과, 그녀의 사후에 재혼한 김성애(金聖愛, 초명 김성팔) 둘이다. 그러나 김정숙이 사망한 후 6.25 남침 직전인 1950년 1월에 부수상(副首相) 홍명희(洪命熹)의 딸 홍영숙 (洪永淑, 洪愛姸(홍애연)?)과 재혼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홍영숙은 결혼후 얼마되지 않아 사망한 탓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성애는 그 후에 결혼한 처이다. 그 외에도 김정숙과 결혼하기 이전에 다른 처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  제2방면군 여자청년부장 김혜순 : 노조에 토벌대 문서
 
 
김일성 첫 아내 한성희(김혜순?)에 대한 증언

임은(허진) 증언 및 유순호 저서 (한성희는 한흥권 동생)
 
 
홍명희도 6.25 전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동행 - 김일성-홍명희 '남다른 인연'     
 
 
김일성, 벽초 홍명희에 특별예우
 
 
 
중책 주고 세간살이 보내줘 며느리, 北(북) 통일신보에 소개 벽초, 本紙(본지)에 ‘임꺽정’ 연재

북한에 생존해 있는 벽초(碧超) 홍명희(1888~1968)의 둘째 며느리(정경완·84)가 예전 살아있을때 북한의 신문 통일신보에 벽초 일가와 김일성간에 얽힌 일화를 상세하게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벽초는 일제시대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냈고, 1928년부터 39년까지 12년동안 세 차례에 걸쳐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임꺽정’을 연재했으며, 38년 조선일보가 벌인 향토문화조사사업에서 편집위원을 맡기도 했다. 벽초는 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에 남아 초대 부수상 등 요직을 지냈으며, 다른 가족들도 벽초가 월북한 직후 평양으로 이주했다.

조선일보 조사부장·논설위원·학예부장 등을 지낸 장남 기문은 북에서 이조실록을 완역하는 등 국문학자로 활동했고, 차남 기무는 북한 사회과학원 소장 등을 역임했다. 손자인 석형은 함북도당 책임비서로 있으며, 석중은 ‘황진이’를 쓴 소설가이다.

벽초와 김일성간의 일화를 소개한 정경완씨는 지난 1950년 전쟁 때 납북된 위당(爲堂) 정인보의 둘째딸로, 정양모(70) 문화재위원장의 누나이기도 하다.


정씨에 따르면 벽초는 48년4월 김일성의 초청으로 아들 기무씨와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했는데, 김일성이 벽초를 행사 주석단에 앉히고, 연설까지 하도록 했으며, 이 행사 직후 벽초가 김일성에게 ‘북에 남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벽초는 김일성이 58년8월 권력장악을 위해 주도한 이른바 ‘종파사건’에서 양반출신의 인텔리라는 이유로 위기에 몰렸으나, 김일성의 도움으로 자리를 유지했다.


당시 김일성은 “홍 선생의 성분이 어떻단 말인가, 과거 ‘림꺽정’을 썼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왜정세월에 일본과 타협하지 않았으니 애국자가 아닌가, 그리고 8·15 이후에 제국주의 편으로 따라가지 않고 우리를 찾아왔지 않았느냐”며 벽초를 감쌌고, 그 후 요직에서 계속 일하도록 했다는 것.


정씨는 또 김일성의 전처인 김정숙은 대동강 기슭 2층에 위치한 벽초의 집에 비단 이불과 쌀, 재봉틀 등 세간살이를 보내주는 등 상당한 ‘배려’를 했다고 전했다. 聯合 (연합)
 
 
***  김일성 - 홍명희에 얽힌 사연.
 
 
 
김일성-홍명희 '남다른 인연'


“북한 김일성-김정숙 부부는 홍명희 일가에 세간채로 집을 물려줬고 56년 그가 양반 출신의 인텔리(인텔리겐치아)라는 이유로 위기에 몰렸을 때 반일애국자라며 감싸줬다.”


북한 무소속 대변지인 ‘통일신보’ 최근호(1.24)에 김일성 주석 가족과 월북작가 벽초 홍명희 집안 사이에 얽힌 장문의 일화가 게재돼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에피소드의 필자는 벽초의 며느리인 정경완(당시 84.평양 대동강구역)씨.

정씨는충남 천안군 목천면에서 태어나 벽초의 아들로 반일운동을 하던 서른두살의 홍기무와 결혼했다. 정씨는 이 글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50년 납북된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선생의 둘째딸이다.




▲ 1958년 5.1절 경축행사가 끝난 뒤 평양시 교외의 호수에서 김일성 주석이 벽초 홍명희 선생과 함께 뱃놀이를 하는 장면. /연합


홍명희 집안은 예부터 솝꼽히는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도 그의 아들 홍기문은 이조실록을 완역한 유명 국학자이고 홍기무도 북한 사회과학원 소장을 역임했다. 손자인 석형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함경북도당 책임비서이고 석중은 ‘황진이’를 쓴 소설가다.

정씨는 58년 5.1절 행사가 끝난 뒤 김일성 주석이 평양시 교외의 호수에서 벽초와 함께 뱃놀이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가보’(家寶)라며 지면에 공개하고 월북과정과 김일성-김정숙 부부,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그는 글 말미에 서울에 있는 동생들이라며 정양모ㆍ양완씨를 언급했다. 현재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중인 정양모(당시)(70)씨는 “그동안 누이의 소식을알려고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확인을 못했었다”면서 “누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해 기쁘다”고 말했다.



정씨가 실은 글을 요약해 재구성해 봤다.



『48년 4월. 그때 서울의 어지러운 정계에서 민주독립당 당수로 있던 시아버지 홍명희는 어느 날 남편 홍기무가 소중히 전해주는 명주천을 받아들고 놀랐다. 그 천은 김일성 주석이 남북조선 정당ㆍ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하라고 보낸 초청장이었다. 이튿날 새벽 시아버지는 남편을 데리고 평양으로 향했다.

얼마후 돌아온 남편의 전언에 따르면 시아버지와 남편이 회의가 진행되던 모란봉극장에 도착, 휴게실로 안내되자 김일성 주석이 나와 참말 반갑다면서 시아버지의 건강과 서울의 우리 집안 형편을 물은 뒤 연석회의 취지를 설명했다.

김 주석은 연석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시아버지를 주석단에 앉히고 연설까지 하게 했다. 또 며칠 뒤 시아버지가 북조선에 남고 싶은 의향을 말했을 때 잘했다면서 “새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족문화도 건설해야 합니다. 민족문화건설을 위해 할일이 많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주석은 48년 7월초 시아버지를 자기 집으로 불러 생일연을 차려줬고 기념으로 양복도 한벌 줬다. 공화국이 창건됐을 때는 내각 부수상의 중책을 안겨줬다. 또 일부 그릇된 자들이 모해를 꾸밀 때도 시아버지를 보호해줬다.


56년 8월에 일부 사람들이 시아버지에 대해 양반 출신의 인테리를 데리고 어떻게 혁명할 수 있겠냐며 공격하고 나섰을 때도 홍 선생의 성분이 어떻단 말인가, 과거 ‘림꺽정’을 썼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왜정 세월에 일본과 타협하지 않았으니 애국자가 아닌가, 그리고 8.15 후에 제국주의 편으로 따라가지 않고 우리를 찾아왔지 않았느냐 하며 요직에서 계속 일하도록 신임을 안겨줬다.


김 주석은 48년 8월 우리 가족을 평양으로 불렀다. 우리 일가는 몇 차례에 나눠 북에 왔다. 나는 남편을 도와 남북 총선거에 참가하는 남조선 대표들을 선출하는 사업에 관여하느라 늦게 평양에 도착했다. 대동강 기슭 2층 집에 살림을 펴고 있었는데 김정숙의 배려로 방마다 비단이불이 쌓여 있고 부엌에는 독마다 쌀이 가득했다. 김정숙은 천과 재봉기까지 보내왔다. 나는 재봉기로 시어머니와 시누이들, 시형(시아주버니)네 가족들, 우리 애들이 입을 옷을 지었다.


또 스무 명이 넘는 우리 가족이 함께 사는데 불편할까봐 자신들의 댁을 가장집물(세간살이)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내줬다. 시아버지가 68년 3월 8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김 주석은 직접 찾아와 고인의 영구 앞에서 눈굽(눈 가장자리)을 닦으며 비감을 억제하지 못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훗날 애국열사릉에 시아버지 유해를 안장케 했다. 여러번 김정숙을 만났는데, 그럴 때마다 어린 김정일 위원장은 석화(필자의 맏아들)의 어머니라며 나를 더 가까이 내세워주곤 했다. 나는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15년간 시아버지를 모셨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편 홍기무에게 사회과학원 소장의 중책을 맡겼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조국통일상도 받도록 했다. 시형인 홍기문에게도 사회과학원 부원장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겸임토록 하고 조국통일상도 줬다.』
 
 

 *  여기서 지나가는길에 문득 생각이 나서 잠깐 옆길로 새겠다.  다름이 아니라 "박헌영"관련 일이다.

 

 

6·25 전쟁 발발 5개월 전인 1950년 1월 17일 이주연 중국주재 북한대사의 파견을 축하하는 연회가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의 관저에서 수상 김일성과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중국이 혁명에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남조선을 해방시킬 때입니다"라며, 스탈린이 남침을 허가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었다.

 

스티코프는 이날 김일성이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스탈린을 만나게 해달라는 말을 연방 되풀이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연회가 끝날 무렵 김일성은 몹시 취했고, 그의 말은 시종 흥분 상태였다고 한다. 반면 정작 초청자였던 박헌영의 이날 언행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그 전해인 1949년 8월 12일과 14일 스티코프와 김일성·박헌영의 대화 기록을 보면 이미 두 사람은 전쟁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본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여름휴가를 떠나기 직전 이들을 만난 스티코프는 "두 사람이 무력 남침의 필요성을 제기했다"고 보고했다. 스티코프는 이날 만찬에서 있었던 김일성·박헌영과의 대화를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이들의 대화록은 1995년 공개된 구(舊)소련 비밀문서에 담겨 있다.












1949년 3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북한 수상 김일성(왼쪽 두번째),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세번째), 부수상 홍명희(네번째)가 스탈린을 방문하기 위해 크렘린궁에 들어가고 있다.


 

 

2002년까지 잇달아 공개된 구소련 비밀문서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의 세부계획이 최종 결정될 때까지 늘 행동을 함께 했다. 스탈린으로부터 전쟁을 승인받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 방문 때도 김일성과 박헌영은 함께 했다. 이 방문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을 면담하고 자세한 전쟁계획을 시달받았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戰勢)가 역전되면서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둘의 갈등은 주로 전쟁을 수행하는 작전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온다는 소식이 들리던 10월 8일 평양 모란봉 지하 김일성 집무실을 방문한 중국대사 예지량의 목격담에 따르면 박헌영은 "즉각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일성은 "남조선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1950년 10월 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모택동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한 편지. 김일성과 박헌영이 나란히 서명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은 1950년 11월 7일 전화(戰禍)를 피해 압록강 연안 만포진에 설치되어 있던 임시 소련 대사관에서 열린 볼셰비키혁명 기념행사에서 폭발했다. 김일성은 전쟁이 열세로 몰리게 된 것에 대한 책임 공방을 벌이다가 박헌영에게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두 사람 모두 취한 상태였고, 서로 막말을 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전 동독 주재 북한대사이고, 당시 외무성 부상이던 박길용의 증언이다.

 

먼저 김일성이 소리쳤다. "당신이 들고 일어난다고 했던 빨치산들은 다 어디 간거야?" 박헌영이 "아니 어째서 낙동강에 군대를 죄다 내려보냈나"라고 반박하자 김일성은 흥분해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출신 배경이 너무 달랐던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8년 9월 북한 정권을 구성할 때부터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박헌영은 8·15 광복 당시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다.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일제 말기까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했던 박헌영이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의 헤게모니를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반면 소련군 장교 출신인 김일성은 정체에 대한 시비가 분분했지만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박헌영을 제치고 북한 권력의 1인자 자리에 올랐다. 나이가 김일성보다 12살 많은 박헌영은 김일성이 193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 10년 전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했다. 공산주의 활동 경력에서 대선배였던 박헌영에게 김일성은 소련을 배경으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풋내기로 비쳤을 것이다.







김일성은 1953년 7월 휴전 후 전쟁 실패 책임을 박헌영에게 돌리고 그와 남로당 일파를 숙청한다. 박헌영이 '남로당원 20만 봉기설'로 전황을 오판하게 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1950년 4월 모스크바 에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의 20만 남로당원이 봉기해서 인민군의 진격을 도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전쟁 한 달 전인 1950년 5월 17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북한 당(黨)·정(政) 간부와 인민군 주요 지휘관 연석회의에서도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박헌영의 '남로당 20만 봉기설'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구소련 문서에 나타나듯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믿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1954년 12월 23일 조선인민군 군·정 간부회의에서 "박헌영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비난했다. "남조선에 당원이 20만은 고사하고 1000명만 있어서 부산쯤에서 파업을 하였더라면 미국놈이 발을 붙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남반부의 군중적 기초가 튼튼하고 혁명세력이 강하였더라면 미국놈들은 우리에게 덤벼들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박헌영은 1955년 12월 5일 반당(反黨)·종파분자·간첩방조·정부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김일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는 북한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정통 공산주의가 막을 내리고, 광신적 개인숭배에 입각한 사이비 공산주의가 승리함으로써 봉건세습 전체주의가 권력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 계기가 됐다.

 

어쨌든 그는 副首相(부수상) 洪命熹(홍명희)의 딸 洪愛姸(홍애연)을 후처로 맞아들였다.

 

김일성이 홍명희 맏딸과 결혼 - 1950년 6월 27일 미국무부 기록되어 있음..

 


미군의 김일성 기록 1954년
김일성이 홍명희 딸과 결혼했다는 미확인 정보가 있다고 했다.
(원문을 올리고 밑에 번역을 올리겠다.)

 

(원문)

 

p.3 홍명희 Hong Myong-Hui / Vice-Premier NK government / 1987. Korea  : 1887의 판독 착오
Surname : Hong, Myong-hui
Children : Unconfirmed report states that one daughter was married to KIM Il-song in 1950.

p.4 김일성 Kim Il-Song / Premier and Marshal / 15, April, 1912, Hankyong-Wae : Mankyong-Dae의 판독 착오

Surname : KIM
Courtry : North Korea
Full Name : KIM Il-song
Aliases, nicknames, variants : KIM Il-sung
Present Title and Military Rank : Premier and Marshal
Branch of Service : None
Current Position : Premier of North Korea (chief of NK state)
Date of Birth : 15 April, 1912
Plane of Birth : Mankyung-Dae, Korea
Nationality and Origin : Korean, middle class farm family
Wife : KIM Chong-suk, died about 1945; unconfirmed information reported him
         married to a daughter of NK Vice-Premier HONG Myong-hui in 1950.
Children : Two sons and two daughters by his first wife.
Education : Primary and middle school, and Soviet Army Officer School in Khabarovsk.
Religion : Unknown
Politics : North Korean Labor Party (Caommunist)
Language : Korean, probably some Russian
Past Career : 1931-1940 : Anti-Japanese Guerilla Leader in Manchuria
                    1941-1945 : Received Soviet military and political training and served
                                    against Japanese in Manchuria, captain in Soviet Army.
                            1945 : Became head of NK Communist Party.
                            1948 : Became NK Premier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NK government.

 

 

(번역)

 

P.3 홍명희 / NK부총리 / 1987년 korea : 1887의 판독 착오
성 : 홍명희
아이들 : 확인되지 않은 보고서에 의하면 한 딸이 1950년에 김일성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페이지 4 김일송 / 수상 겸 원수 / 1912년 4월 15일, 한경왜 : 만경대

성 : KIM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풀네임 : 김일성
별칭, 닉네임, 변형: 김일성
현재 직함 및 군사 계급: 수상 및 보안관
서비스 분기: 없음
현직 : 북한 내각총리대신(NK주재)
생년월일 : 1912년 4월 15일
대한민국 만경대 출생면
국적과 기원 : 한국중산층농가
부인 : 김정숙 여사, 1944년 사망, 미확인 정보 보고
1950년 홍명희 NK 부총리의 딸과 결혼했다.
자녀: 그의 첫 번째 부인이 낳은 2남 2녀.
교육: 육문중학중퇴 그리고 소련 육군 장교 학교 확실하지는 않지만 졸업가능성도 있음..
종교: 알 수 없음
정치: 북한 노동당 (공산당)
언어: 한국어, 아마도 러시아어일 것이다.
과거 경력 : 1931년 ~ 1940년 : 만주지역 항일 게릴라 지도자
1941년 ~ 1945년 : 소련의 군사 및 정치 훈련을 받고 복무함
만주에서는 일본군과 소련군에서는 대위.
1945년 NK공산당 당수가 되었다.
1948년 : NK 정부 수립과 함께 NK 수상이 되었다.


출처:미군의 김일성 기록 - 1954년

 

 


김정숙 사후 김일성이 홍명희의 딸 홍영숙과 결혼했다는 것은 당시 언론보도와 6.25 때 체포된 김일성 전속 간호사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도 이를 사실이 아니라며 반공 이데올로기가 조작해낸 헛소문이라고 우기는 작자도 있다. 홍명희의 딸은 결혼 후 곧 죽었기 때문에 김성애(김성팔, 金星八)보다 앞서 김일성의 처가 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상..  계속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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