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역사) 김일성 암살사건

『안두희(安斗熙)는 백의사(白衣社) 요원이 아니다』

김일성(金日成) 암살 기도 백의사(白衣社) 행동대원 이성렬(李聖烈)씨 『안두희(安斗熙)는 백의사(白衣社) 요원이 아니다』
 
 
 
***  실리보고서가 일으킨 파문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이성무(李成茂)·이성무)는 지난 9월4일 기자회견을 열고 『백범(白凡) 김구(金九) 시해범 안두희(安斗熙)가 미(美) 방첩대(CIC) 요원이자, 우익(右翼) 단체인 「백의사(白衣社)(백의사)」 특공대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미(美) 제1군 사령부 정보참모부 조지 실리 소령이 백범(白凡) 암살 직후인 1949년 6월29일 작성한 「김구(金九) 암살관련 배경정보」라는 문서가 공개되자, 언론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이성무(李成茂) 국사편찬위원장은 『현재로선 미국이나 백의사(白衣社)가 백범(白凡) 암살에 개입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일부 언론들은 미국이 김구(金九) 암살의 배후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9월7일 한 노인이 「*간조*사(月刊朝鮮社)」로 찾아왔다. 노인의 이름은 이성렬(李聖烈)(이성렬). 그는 1946년 3월1일 평양역전(驛前)에서 있었던 김일성(金日成) 암살미수 사건 당시 백의사(白衣社) 행동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그후 미(美) CIC에 근무했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마치 백의사(白衣社)나 미(美) CIC가 백범(白凡) 선생 암살 배후인 것처럼 보도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면서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  「김구(金九)의 테러조직」 소리 들었던 백의사(白衣社)



이성렬(李聖烈)씨는 1926년 평남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근춘(李根春)(이근춘)은 일제말(日帝末)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의 조카 김흥두(金興斗)(김흥두)를 집에 숨겨주는 등 민족의식이 강한 분이었다고 한다.


1945년 7월 어느 날 친구 김원삼(金元三)(김원삼)이 이성렬(李聖烈)씨를 찾아왔다. 김(金)씨는 『서울에서 여운형(呂運亨)(여운형) 선생의 밀사(密使)(밀사)가 왔다. 일본이 곧 망한다고 하면서 서울에 와서 건국운동을 하자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성렬(李聖烈)씨는 김원삼(金元三)·강혁(康赫)(강혁) 등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몇 달간 이성렬(李聖烈)은 건국준비위원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광복 후의 혼란을 목격했다. 한번은 여운형(呂運亨)의 수행비서였던 김용기(金容基)(김용기·전(前) 가나안 농군학교장)씨가 그에게 『송진우(宋鎭禹)(송진우)·장덕수(張德秀)(장덕수)는 민족반역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김(金)씨는 그들이 왜 민족반역자인지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한국민주당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여운형(呂運亨)을 존경하고 있던 이성렬(李聖烈)은 김용기(金容基)의 얘기를 들으면서 여운형(呂運亨)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9월에는 종로에서 한민당(韓民黨)이 주최한 연합군 환영 시민행진을 좌익(左翼)이 폭력으로 막는 일이 발생했다. 서서히 고개를 드는 좌우익(左右翼) 갈등을 의아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이성렬(李聖烈)은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가 서울의 상황을 부친께 보고하자 부친은 『염응택에게 가 보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와 백의사(白衣社) 사령(司令)(사령;단장) 염동진(廉東震)(염동진·본명 염응택)과의 첫 만남이었다. 백의사(白衣社)는 낙양군관학교 출신인 염동진(廉東震)이 1942년 평양에서 조직한 비밀독립운동단체 「대동단(大同團)(대동단)」이 모체(母體). 백의사(白衣社)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북한의 토착 공산주의자 현(玄)준혁 암살사건으로 일대 검거 선풍이 불어 조직원들이 월남(越南)한 후(後)부터라고 한다.


이번에 공개된 실리 소령의 보고서에 의하면 염동진(廉東震)은 그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김구(金九)의 배신으로 중국 공산당 정보부에 넘겨졌으며, 그들에 의해 고문을 받다가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한다. 이성렬(李聖烈)씨는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


『광복 후 좌익(左翼)들이 「이승만(李承晩)(이승만)의 테러조직은 삼우회(三友會)(삼우회), 김구(金九)의 테러조직은 백의사(白衣社)」라고 할 정도로 백의사(白衣社)는 백범(白凡)선생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백범(白凡) 선생이 염(廉) 사령(司令)을 중국 공산당 정보부에 넘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내가 1945년 9월 염(廉) 사령(司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눈이 잘 안 보인다고는 했지만 맹인(盲人)(맹인)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38선을 넘어올 때 같이 월남(越南)하던 백관옥(白寬玉)(백관옥)에게 염사령(廉司令)이 「눈이 안 보인다」는 얘기를 하더랍니다. 서울에 와서는 아주 맹인(盲人) 행세를 했지만, 모두 반신반의(半信半疑)(반신반의)했어요.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 염(廉) 사령(司令)이 맹인 행세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  백의사(白衣社)와 중앙정치공작대



실리 보고서에는 염동진(廉東震)의 백의사(白衣社) 조직은 군(軍)·경찰·공무원·정당·사회단체·청년단체 등에 광범위하게 뻗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성렬(李聖烈)씨에 의하면 백의사(白衣社) 조직이 그처럼 각계 각층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염동진(廉東震)이 이범석(李範奭)(이범석)·신익희(申翼熙)(신익희)·이청천(李靑天)(이청천) 등과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앙정치공작대」를 이끌었던 신익희(申翼熙)와 가까이 지냈는데, 조직운영에 있어서는 「백의사(白衣社)=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앙정치공작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성렬(李聖烈)씨는 백의사(白衣社)가 파시스트적·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국수주의적)이라는 실리보고서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백의사(白衣社)가 친(親) 김구(金九)노선의 민족주의 단체였지만 확고한 이념적 바탕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파시스트적이니,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이니 하는 것은 민족주의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미국측의 오해입니다』


1946년 2월 이성렬(李聖烈)은 염동진(廉東震) 사령(司令)의 부름을 받았다. 부사령(副司令) 박경구(朴徑九)(박경구)도 함께 있었다. 염(廉) 사령(司令)은 박경구(朴徑九)를 통해 권총을 한 자루 내주면서 『바로 평양으로 올라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직전 백의사(白衣社)와 정치공작대 사이에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던 정치공작대 조직부장 조중서(曺仲瑞)(조중서)와 정치공작대원 김제철(金濟哲)(김제철·당시 39세)·김형집(金亨集)(김형집·당시 19세)·최기성(崔基成)(최기성·당시 20세) 등이 김일성(金日成)을 암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먼저 당시 서울 가회동에 머무르고 있던 연안파(延安派)(연안파) 공산주의자인 독립동맹 부위원장 한빈(韓彬)(한빈)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후 북(北)으로 떠났다. 이성렬(李聖烈)씨에게 떨어진 임무는 일종의 독찰(督察)(독찰) 임무였다. 북(北)으로 간 일행이 정말 김일성(金日成)을 암살하려 하면 도와주고, 그렇지 않으면 배신자로 간주,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  김일성(金日成)을 암살하라



평양에서 김제철(金濟哲) 일행과 합류한 이성렬(李聖烈)은 김일성(金日成)을 암살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확인했다. 1946년 3월1일 평양역전(驛前)에서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행사장에는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 타도」, 「민족반역자 조만식(曺晩植)(조만식) 타도」 등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김형집(金亨集)은 수류탄, 이성렬(李聖烈)과 최기성(崔基成)은 권총으로 무장하고 행사장에 참석했다. 김일성(金日成)이 연설을 시작하는 순간 이성렬(李聖烈)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면, 김형집(金亨集)이 수류탄을 투척하고, 수류탄이 터지지 않을 경우 최기성(崔基成)이 권총으로 김일성(金日成)을 쏘기로 했다. 김제철(金濟哲)은 그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긴 지인(知人)이 따라붙어 미행을 하는 바람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날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지나치게 긴장한 김형집(金亨集)이 안전핀을 제대로 뽑지 않은 채 수류탄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연단에 떨어진 수류탄은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경비 중이던 소련군 야코프 노비첸코 준위가 수류탄을 집어 멀리 던져버리려는 순간 수류탄이 터졌다. 노비첸코는 오른팔이 잘려나가는 등 몸 다섯 군데에 중상을 입었다 (노비첸코는 제대 후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다가 1984년 방소(訪蘇)한 김일성(金日成)과 재회했다. 그후 노비첸코는 북한으로부터 「노동영웅」 칭호를 받고, 김일성(金日成)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 당국으로부터 극진한 예우와 지원을 받았다. 지난 8월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金正日)은 귀국길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노비첸코의 유가족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김형집(金亨集)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지만, 아지트로 돌아온 나머지 백의사(白衣社) 사원(社員)들은 다른 공산당 요인들의 목숨을 노렸다. 김일성(金日成) 암살작전에 참여하지 못했던 김제철(金濟哲)(그는 이때부터 김정의(金正義)로 개명(改名)했다)과 새로 가담한 이희두(李希斗)(이희두)가 거사에 참여했다. 이들은 3월5일과 7일에는 최용건(崔庸健)(최용건)의 집을, 같은 달 9일에는 김책(金策)(김책)의 집을 습격했지만, 그들이 김일성(金日成) 암살미수 사건 이후 집을 비우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성렬(李聖烈) 일행은 3월13일 자정 무렵 북조선 임시위원회 서기장 강양욱(康良煜)(강양욱·전(前)북한 국가부주석)의 집을 습격했다. 이날 거사에는 이성렬(李聖烈)의 중학 동창인 최의호도 가담했다. 이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권총을 난사, 강양욱(康良煜)의 가족들을 몰살시켰지만, 강양욱(康良煜)을 암살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성렬(李聖烈) 등은 추적해 온 보안대원들과 교전 중 최기성(崔基成)이 사망했고, 이희두(李希斗)는 얼굴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최의호는 부근에 사는 친지의 도움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다른 아지트에 은신하고 있던 김제철(金濟哲)과 또 다른 동지 조재국도 며칠 후 체포되었다. 이성렬(李聖烈)만이 간신히 체포를 모면, 3월말(月末)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안두희(安斗熙)는 백의사(白衣社) 사원(社員)이 아니다』



서울로 돌아온 이성렬(李聖烈)은 미군(美軍) CIC에서 조사관(Investigator)-그 후에는 특별보좌관(Special Assistant)-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백의사(白衣社)에서 미군(美軍) CIC로 파견나간 것』이라고 표현했다. 후일 장면(張勉)(장면) 총리의 정치고문을 지낸 도널드 위태커가 이 무렵 CIC 북한과(課)에 있었다.


1947년 7월 여운형(呂運亨)이 암살되었다. 사건 직후 백의사(白衣社) 내(內)에서는 「집행부장」으로 알려졌던 이성렬(李聖烈)이 여운형(呂運亨)을 암살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범인은 한지근이라는 젊은이였다. 이성렬(李聖烈)과는 CIC에 출입하던 정치(政治) 랑인(浪人) 신동운을 통해 아는 사이였다. 실리 보고서는 여운형(呂運亨) 암살에 백의사(白衣社)가 개입했으리라고 시사하고 있지만, 이(李)씨는 이를 부인했다.


이성렬(李聖烈)이 CIC에 근무하던 어느 날, 김성주(金聖柱)(김성주) 서북청년단 부위원장이 지나가는 한 젊은이를 가리키며 『쟤는 말(영어)도 못하면서 뭐하러 여길 드나들어』라고 말했다.


이성렬(李聖烈)은 김흥두(金興斗)와의 인연도 있고 해서 백범(白凡)선생의 거처인 경교장(京橋莊)(경교장)에도 곧잘 드나들었다. 백범(白凡)선생이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백범일지)」에 서산(西山)대사의 선시(禪詩)(선시)를 써서 준 일도 있었다 (이 책은 6·25 전쟁 때 분실했다고 한다). 경교장(京橋莊)에서 그는 김성주(金聖柱)가 말하던 그 젊은이를 봤다. 백범(白凡)선생의 비서들은 『저 사람 백범(白凡)선생님과 가까운 척하면서 자꾸 여길 드나든다. 뭘 하려는 건지…』라고 말했다.


1949년 6월26일 백범(白凡) 암살사건이 나고 암살범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을 때, 이성렬(李聖烈)은 그 젊은이가 안두희(安斗熙)(안두희)라는 것을 알았다.


이성렬(李聖烈)씨는 『내가 아는 한 안두희(安斗熙)는 백의사(白衣社) 사원(社員)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자신은 직접 행동에 참여하는 조직원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지만 안두희(安斗熙)는 알지 못했으며, 백의사(白衣社)의 친(親) 김구(金九)노선으로 보아 백의사(白衣社)가 김구(金九)를 암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리보고서를 접한 이신철 역사문제 선임연구원은 『공산주의와 관련된 백범(白凡)의 사상적 노선 변화가 그의 반대자들에게는 용공성(容共性)으로 보일 빌미를 마련해 주었으며, 이것이 곧 암살을 불러왔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9월4일 연합뉴스).


***  『안두희(安斗熙)의 범행은 소(小)영웅주의의 발로』

그 가능성을 강하게 부정하는 이성렬(李聖烈)씨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백의사(白衣社)의 입장을 물어보았다. 그것은 곧 백범(白凡)에 대한 백의사(白衣社)의 평가와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원(社員)들은 「우선 나라는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염(廉) 사령(司令)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구요. 그런 염(廉) 사령(司令)을 보면서 「염(廉) 사령(司令)도 이젠 역부족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염(廉) 사령(司令)과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李)박사보다는 김구(金九)선생과 더욱 가까웠을 겁니다』


―백범(白凡)선생의 단정(單政) 수립 반대·남북협상 노선이 백의사(白衣社) 사원(社員)들에게 용공적(容共的)인 것으로 보였고, 그 때문에 암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건 절대 아닙니다. 백의사(白衣社) 사원(社員)들은 대개 단정(單政) 수립에 찬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김구(金九)선생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요. 우리들로서는 백범(白凡)선생을 어떻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이성렬(李聖烈)씨는 안두희(安斗熙)가 자기가 모르는 현장요원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미(美) CIC 요원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美) CIC가 백범(白凡)암살의 배후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라는 부대 이름에서도 보듯 부대 성격상 미(美)CIC는 암살이나 암살 사주와 같은 적극 공작을 벌이는 곳은 아니라는 것이 이(李)씨의 주장이었다.


이(李)씨는 안두희(安斗熙)가 백범(白凡)선생을 암살한 것은 특정 집단의 치밀한 계획과 사주(使嗾)(사주)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월남(越南) 후 기댈 데 없어 마음속에 울분을 품고 있던 젊은이의 소(小)영웅주의의 발로로 보았다.
 


『내가 처음 월남(越南)해 왔을 때 김용기(金容基)씨가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는 민족반역자」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걸핏하면 「○○○가 나쁜 놈」이라는 식의 얘기가 떠돌곤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열혈(熱血) 청년들이 일을 저지르곤 하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어요. 안두희(安斗熙)가 백범(白凡)선생을 암살한 것도 그런 의식의 발로일 겁니다』


이(李)씨는 실리보고서에 대한 보도를 접하는 순간 『의도적으로 이 땅의 우익(右翼)과 미국을 흠집내려는 세력이 장난을 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백의사(白衣社)와 미(美) CIC에서 근무했고, 먼 발치에서 안두희(安斗熙)를 지켜보았던 자기로서는 그런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월간조선사(月刊朝鮮社)」를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  5·16 후 반(反)혁명죄로 투옥되기도



백의사(白衣社)는 1948년을 전후하여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부가 수립되고 공권력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백의사(白衣社)의 활동 공간은 좁아졌다. 조직원들은 군(軍)이나 경찰에 투신하거나, 각자 밥벌이를 찾아 흩어졌고, 백의사(白衣社)는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염동진(廉東震) 사령(司令)은 6·25 전쟁이 일어난 후 공산군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성렬(李聖烈)씨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미(美) 7항만사령부 정보치안국·미(美) 7사단 CIC·8240부대 등에서 근무하면서 전쟁을 치뤘다.


백의사(白衣社)와 신익희(申翼熙)의 중앙정치공작대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유진산(柳珍山)(유진산)이 백의사(白衣社) 총무를 지낸 인연으로 민주당계(系)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냈던 그는 1962년 민주당 반(反)혁명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獄苦)(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옛 8240부대 출신자들을 동원, 박정희(朴正熙) 장군을 암살할 생각으로 동조자들을 물색하다가 가까이 지내던 민주당계(系) 정치인들과 함께 반(反)혁명음모죄로 엮여 들어간 것. 이후 특사(特赦)(특사)를 받아 풀려났지만, 정보기관의 요시찰(要視察)(요시찰) 인물로 분류되는 바람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1969년에는 「3선(選) 개헌반대 범(汎)국민투쟁위원회」 최고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다. 1990년 김일성(金日成) 암살시도 등 반공(反共)투쟁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강영철(姜英哲) 국사편찬위원회 편사(編史)부장과의 일문일답(一問一答)


『실리 보고서 공개에 정치적(政治的) 의도는 없다』


기자는 9월11일 저녁 국사편찬위원회 강영철(姜英哲)(강영철·57) 편사부장(編史部長)(편사부장)과 실리 보고서에 관해 전화통화를 나누었다.


─실리 보고서 관련 보도가 나간 후 언론에서는 백범(白凡) 선생 암살사건 배후에 우익(右翼) 세력과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국사편찬위원회가 실리 보고서 관련 내용을 공개한 것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진행 중인 「해외사료(海外史料)(해외사료) 이전(移轉)(이전) 사업」의 성과를 알리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언론보도가 우리의 본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바람에 우리도 당혹스럽다』


강(姜)부장은 『「해외사료(海外史料) 이전사업」은 금년에 10억 원, 내년에 1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국사편찬위원회 추진 단위 사업 가운데 가장 큰 사업』이라고 덧붙였다. 강(姜)부장은 『그동안 해외(海外) 사료(史料)의 발굴, 이전사업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별 관심을 끌지 못해왔다. 그래서 이번에 발굴한 사료(史料) 가운데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놀랍고 특이한 내용들을 공개하여 이 사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어쨌든 실리 보고서 공개로 인해 국민들은 백범(白凡) 선생 암살사건 배후에 마치 우익(右翼) 세력과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한두 가지 문건(文件)을 가지고 해방 정국의 의혹들이 전부 해결된 것처럼 보도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 아닌가? 나도 우리 언론이 이렇게까지 얄팍하고 선정적인 줄은 몰랐다』


─이 시점에 우익(右翼)과 미국에 흠집을 내는 사료(史料)를 공개한 데에는 어떤 정치적 흑막(黑幕)(흑막)이 있는 것 아니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친구들 가운데도 8·15 방북단(訪北團) 파문을 잠재우려고 실리 보고서를 공개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학자적 양심을 걸고 말하는데 그건 절대로 아니다. 발표 날짜를 9월3일로 잡은 것은 방북단 파문 훨씬 이전이었다. 이번 발표에 정치적 의도 같은 것은 없다』


강(姜)부장은 『반공(反共)단체 등에서 항의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나도 대한민국이라는 집의 기본틀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일이 이렇게 돼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리 보고서 관련 보도가 국사편찬위원회의 본의와는 다르게 흘렀다면, 적극적으로 해명 기자회견을 하든가 해서 국민들의 오해를 풀어줘야 하지 않나?


『지금 보도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계획은 없다』


강(姜)부장과 통화하기 전(前)인 9월10일 기자와 통화한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운 연구사도 강(姜)부장과 거의 같은 얘기를 했다. 김(金)연구사는 『이번에 발굴한 실리 보고서 등만 가지고 어떤 역사적 사건의 실체가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언론에서는 백범(白凡)선생 암살 사건의 배후에 백의사(白衣社)와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내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남로당(南勞黨) 출신 북한 외무성 초대 부상(副相) 이강국(李康國)(이강국)과 시인(詩人) 임화(林和)(임화)가 미(美) CIC의 첩자였다는 내용도 있었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공개한 것은 안두희(安斗熙)가 백의사(白衣社) 및 미(美)CIC와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 - 그것도 1949년 6월이 아니라 1948년 12월의 시점에서 - 과 관련되는 부분 뿐이다. 나머지 내용들은 각 언론사에서 자체적으로 취재해서 쓴 것이다』


이성무(李成茂)(이성무·64) 국사편찬위원장과는 수차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이(李)위원장의 국정감사 출석·회의 주재·방북(訪北) 등으로 통화하지 못했다. 9월11일 오후 기자와 통화한 이영춘 국사편찬위원장 비서관은 『「월간조선(月刊朝鮮)」기자로부터 전화인터뷰 요청이 있었다는 사실과, 김광운 연구사와 통화한 내용을 위원장께 보고드렸다』면서 『위원장께서는 「김광운 연구사의 얘기를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입장으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

 
 
  이상..
 






덧글

  • 광주폭동론 2021/06/02 12:39 # 답글

    인민공화국을 뭉갠 미군정은 괴뢰반동 세력들을 사주하여 민중들을 탄압하였죠. 일본통치는 9년만에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지만 미군통치는 1년만에 대구인민봉기가 일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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