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말기 북 역사란..(하)편 마지막편

(하)편. 마지막편



13일 야영지 근처의 아무르강가에 수송선이 도착해 사람들의 기대를 고조시켰다.

부대가 정렬하여 막 승선하려 할참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이 보낸 전보가 도착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거기에는

《" 동북은 여러분의 동북이다. 소련 붉은군대의 임무는 동북해방에 있다. 동북건설의 임무는 여러분의 것이다. 명령을 기다리라 " 고 되어 있었다.》

주보중(저우바우중)도 일기에서 " 하바로프스크에서 별도로 교섭을 벌였어도 배편이 없기 때문에 제자리에 기다리라는 회답을 받았을 뿐."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항일연군의 주력은 대일전에 참가할수 없었다.


*** 소련군과 동북항일연군교도려 1939년 10월. 일제의 관동군이 7만5천명의 병력과 4천만엔의 경비를 투입하며 대대적인 " 빨치산 소탕작전" 에 나서면서 항일연군은 곤란한 국면에 직면했다.

전설적인 빨치산 지도자 양정우(양징위)가 이끌던 제 1방면군이 완전 궤멸해 큰 충격을 던진 가운데, 연군 "총지휘자" '위증민'은 '코민테른(국제공산연합단체)'에 보낸 편지에서 "부상당한 동지와 연장자들을 국경의 안전지대 (곧 소련 영내)로 보냄으로써 부대의 행동을 쉽게 하고 공작을 용이하도록 한다" 는 제안을 하고 있다.


이어 상황이 악화되면서 나머지 전투 가능한 대원들도 소련 영내로 '철수'했다.

일제 관헌의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40년 8월 안도현을 출발하여 소련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김일성은 소련쪽과 연락이 없었던 상태에서 들어갔기 때문에 소련쪽에 의해 '보로시로프 감옥'에 한때 억류되었다가주보중(저우바우중)의 촉구로 풀려 났다는 사실이 < 동북항일연군투쟁사 > (년 중국 인민 출판사)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 [참고로 주보중은 1902년 생이고 김일성(김성주)는 1912년 생이다.

즉 '주보중(저우바우중)'이 김일성 보다
10살이 더 많다.


이어 1940년 9월3일 소련 극동군 당대표 '왕신림'은 소련 영내로 속속 도착한 항일연군 각 부대에 전신을 보내 '하바로프스크 회의 소집'을 알리면서 "중국공산당 중앙대표가 오니 꼭 회의에 참가할 것" 을 요청했다.

이때 중국공산당 중앙은 이미 대표를 보낼 수 없다고 통보한 뒤였다. 따라서 이런 회의 소집방식은 (소련군이 항일연군에 대해아무 지도력도 발휘하지 못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항일연군이 존재한, 전 기간중 단 한번 호화멤버들의 대면이 이뤄진

이 회의는 1941년 1월말부터 2월10일까지 계속됐다. 이에 대해 중국쪽 자료들은 "소련 극동 당국의 대표가, 소련군에 의한 항일연군부대의 합병이라는 " 황당무계한 주장" 을 내놓아 이들로부터 반론을 받았다" 고 전하고 있다.

회의 전 항일연군은 주보중 주재로 유격대 간부 회의를 열어 이에 대한 반대입장을 결의안으로 작성했다.

소련쪽의 방안은 유격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유격전을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만주에서의 유격전을 종결시켜 부대를 소련군을 위한 정찰,첩보활동에 이용하려는 의도로 읽히기도 했다.

*** '조선인민혁명군'의 실체에 관해 널리 알려진 것처럼 현재 북한에서는 김일성에의해 '조선인민혁명군'이 창설되었다고 설명되고 있다.

그 창설시점은 1934년 3월로 돼있는데,
이것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의 창립시점으로서 무리한 주장이다.

1948년 3월만 해도 '김일성 장군 빨치산 부대' 라는 표현이 북한에 일반적으로 사용됐으나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2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인 만주파 '강건'이 인민군 창건 2돌에 즈음해 이런 주장을 하면서 "1934년 김일성 장군이 '조선인민혁명군'을 만들었다" 는 설이 정착되었다. 결국 '조선인민군 창건은 단언할수는 없지만 "김일성과 관계되는 최초의 신화"일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현재 남한학자 많은 분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았다.로 평가를 한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당시 조선인,중국인 빨치산 유격대들이 합쳐 만든 '동북항일연군' 부대를 주관적,내용적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요 근래에 저명한 장세윤
교수가 중국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명칭이 써져있는 당시 30년대의 서적을 발견하므로써 애매한 상태이고 또 당시 증언들에서도 중국에서 싸울데는 '동북항일연군' 이라고 불렸으며 조선국경지대에서는 인민들이 '조선인민혁명군' 이라고 불렸다는 증언도 있는걸로 봐서, 북한의 주장을 전혀 무시할수는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 '동북항일연군'의 결성은 1935년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 강화를 내용으로 한 드미트로프 테제가 체택된 이후 길동특위에서 이 지역의 모든 항일군을 규합하여 연합부대로 만들 것을 결의하면서 이뤄졌다.

그리하여 36년 1월 '북호두 유격대 간부회의'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해 연군의 창설과 함께 조선인의 경우 특수성을 들어 별도의 '조선인민혁명군' 을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김일성이 "항일연군의 기치를 견지 공동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동북항일연군' 단일대오를 꾸리기로 했다고 중국쪽 자료인
< 현대동북사 > 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반일총회 가운데 조선인 대중은 분리해 '조선조국광복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김일성 부대의 경우 근거지인 장백지구로부터 북한 국경지대까지를 대상으로 '광복회 장백현 공작위원회' 를 두고 활동했다.


이상... 끝 편.. 下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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