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비교..황장엽의 객과적인 비교.(상)편

상~중~하)편작으로 됨.


(상)편.



※ 이는 사심없는 비교 분석이다.
황장엽은 망명함으로써 그의 가족들,손자까지 비참한 말로를 걸었다.

즉 '김씨'왕조 하면 철천지 원수가 된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모든걸 대했다.


○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 황장엽 선생이 쓴 글) 김일성? 김정일 비교분석.


◇ [ 저는 개인적으로 동국대 북한학과 졸업한 일반 사회인 입니다. 종교와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서 대학원에서 역사학도 공부했고 나름대로 시간되면 학습하는걸 취미로 삼기도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복잡한거 싫어해서 우파,좌파,진보,보수 이런거 좋아하지 않고 이해도 안갑니다. 전 그냥 있는사실 그대로있는그대로 평가하고 글을 쓰거나 생각하고 주장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거 서두가 너무기네요.. ]


☆☆☆ 그럼~ 본론으로.. (** 이 내용의글은 실제 황장엽 선생님이 쓴 글로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 분석한 것 입니다.)


황장엽 작성.. ( ** 아래 내용은 황장엽의글로써,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분석한 것이다. 북한 역사에서 북한권력자 김일성과 김정일 두 사람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지켜보면서 직접 겪은 황장엽이 쓴 이 글은 70년 북한사 권력내부의 흐름을 알 수 있는귀중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황장엽의 시각도 전혀 문제 없는 것은 아니나, 북한정권의 성격과 내막을 알수 있는 글이기에 옮겨 왔다. )


■ 북한 실권자 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비교분석


황장엽 씀.



1) 독재자로서의 김일성과 김정일 수령의 개인독재 체제에서는 수령개인의 자질과 성격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나는 1958년 1월초부터 1965년 4월까지는 김일성의 이론서기로 일하였고 그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서 그의(김일성)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진 관계로 그와 자주 접촉하고 연계를 가졌다


그리고 1972년 부터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서, 그리고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체계화하는 문제 때문에 그와(김일성) 자주 만나 사업을 같이 하였다. 1979년 부터는 당중앙위원회의 주체사상 담당비서,과학교육 담당비서, 국제사업 담당비서로서 김일성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의 이론서기를 할 때 받았던 인상은 매우 좋았다. 김일성은 근면하고 지혜롭고 위신 있게 행동하였다. 매주 한번씩거진 빠짐없이 정치국 회의를 자기 집무실 옆에 있는 소회의실에서 진행하였는데 우리 서기들은 꼭 참가시켰다.


김일성은 먼저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설명하였으며 그에 대한 대책도 말하였다. 그의 특징은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지 않도록 쉬운 말로 철저히 해설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이 다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 의견을 충분히 말한 다음 참가한 간부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여기서도 부자연스러운 점이 없었다.


그는 제기된 의견에 대하여 모두 정확하게 해명하여 주었다. 나는 이 정치국 회의에참가하여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우리 서기들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자기가 공장이나 농촌을 현지지도 할때에는 꼭 따라다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해야 할 사업이 많기 때문에 항상 따라다니지는 못하였다. 어떤때에는 그가 먼저 나가 현지지도를 하다가우리를 부를 때도 있었다.


그는 공장과 농촌에 대한 현지지도 때에도구체적으로 잘하였다. 노동자, 농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으며 공장과 농촌지도 일군들에게 조금도 압박감을 주지 않고 지도하였다.


◇ 몇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1958년에 김일성은 지방에 있는 자체의유휴자재와 원료를 이용하여 지방에서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들을 대대적으로 건설할 데 대한 방침을 내놓으면서 여성들이 직장에 나와 일할 데 대한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였다.


이 시기에 공장 기업소들과 기관책임자들의 회의가 있었다. 김일성은 지배인들에게 가정부인들을 직장에 진출시킬 데 대한 당의 방침을 설명해 주고 각 직장에서 여성들을 대담하게 채용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많은 지배인들이 반대의견을 제기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여성들을 채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노동력이 부족하여도 남자들끼리만 일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어느 지배인은 "여성을 채용하는 것은 국가의 손해가 됩니다. 그 이유로 첫째는 여성들에게 선전산후에 유급휴가를 주어야하며(처음에는 90일이었으나 그 후 150일로 늘어났다.),


둘째는 어린아이가 조금 감기만 걸려도 직장에 나오지 않으며,


셋째는 말만 많이 하고 일은 안하며 특히 뒤에서 간부들의 흉을 보는 것을 일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김일성은 그 지배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우리가 여성들을 직장에 내보내자는 것은 단순히 노동력이 부족 되어서가 아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집에서 부엌일만하고 있으면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진다.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지면 자연히 남편이하는 일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여 방해하게 된다.


사실상 부엌일만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고말할 수 없다. 우리는 여성들을 부엌에서해방하고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부터 여성들이 아이들을 기르는데 걱정 없이 마음놓고 직장에 나갈 수 있도록모든 곳에 탁아소, 유치원, 진료소를 건설해 주도록 하여야 한다."


그 후 도시와 농촌 곳곳에 탁아소, 유치원,진료소가 운영되었고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1959년이었다. 그 해에는 공업은 발전되었지만 농사가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양식을 사오는 문제가 정치국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쌀은 비싸기 때문에 잡곡을 사와야 하겠는데 잡곡 가운데서도 무슨 잡곡이 좋겠는가


이상.. (중)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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