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비교..황장엽의 객과적인 비교.(중)편

(중)편.



그래서 양식을 사오는 문제가 정치국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쌀은 비싸기 때문에 잡곡을 사와야 하겠는데 잡곡 가운데서도 무슨 잡곡이 좋겠는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논의되는 것을 한참 듣고 있던 김일성은
"나는 여러 가지 잡곡을 다 먹어보았지만 그 중 제일 좋은 것이 고량(수수)같이 생각되었다. 고량을 사오는 것이 어떤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모든 어려운 생활을 다 겪어 본 분이 다르구나"하고 속으로 감탄하였다. 어느해 평안북도 창성군의 농촌을 현지지도 했을 때의 일이다.


리(理)당 비서가 김일성을 안내하였는데리당비서의 집이 지주집을 몰수한 것으로서 좋은 기와집이었다. 리당비서는 해방전에 그 지주집에서 머슴을 살았다고 한다.

김일성은 집을 돌아보고 부엌에 들어가 살림형편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옆집에도 들렀다. 그 옆집은 작은 집이었는데 깨끗이 꾸려져 있었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가마 안에 점심 밥그릇을 넣어 두었기 때문에 밥이 식지 않고 따끈따끈 하였다.


또 장 단지와 채소절임단지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이 집주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리당비서는 "그는 해방 전부터 목수일(목공)을 해온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의 월수입은 리당비서의 절반도 안되었다. 그러나 살림은 오히려 훨씬 문화적이었다. 김일성은 리당비서에게 이 목수집같이 집을 잘 거두고 문화적으로 규모
게 살라고 충고를 주었다.


그리고 수행원들에게 "수입이 많다고 반드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문화수준이 문제이다. 해방 전 목수는 해방 전 머슴보다문화수준이 높기 때문에 수입은 리당비서보다 절반밖에 안되지만 살림은 오히려 리당비서보다 낫다"고 하였다.


우리는 김일성의 높은 식견에 감탄하였다. 김일성은 손님들을 접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정치대표단들 뿐 아니라 학자대표단, 예술인 등 외국인대표단을 많이
만났다.


김일성은 대중집회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간부들과 협의회도 많이 하였고 협의회 참가자들의 의견도 열심히 들었다.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무자비하였으나동료들과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그는 공식적인 회합 이외에 측근자들만 모아놓고 술파티같은 것을 조직하는 일이 없었다. 김일성은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참작하여 정책을 결정하였으며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간부들을 모아놓고 자기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서기들이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아래 당 조직에 내려보냈다. 아래기관에 지시할 때에는 직접 책임간부들을 부르든가 전화로 하였다.


자기가 방향을 준 다음에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보좌하는 간부들이 자체로 결심하여처리하도록 맡겨두었다.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많이 하였으며 현지실정에서 많은 것을 착안하였다.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실천에 옮길 때도 한 단위에서 먼저 실험 삼아 해보고 경험을 쌓은 다음 그것을 더욱 일반화하였다.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지 않고자기 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해나가
록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큰 나라들의 나쁜 영향을
거진 받지 않았다. 이는 내가 1958년부터 1965년 초까지 김일성의 이론서기를 할때에 느낀 인상이다.


다만 내가 그의 작풍(作風)에서 굳이 부정적인 면을 찾는다면..<자기 친척들을 지나치게 신임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김일성이 점점 교만하게 되고 일을 잘못
처리하게 된 것은 1974년에 당시 제2인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기 동생(김영주)을 내쫓고 자기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한 다음부터라고 생각된다.


1945년부터 1974년까지는 김일성의 독재정권이 수립되고 공고화되는 <김일성시대>였다. 1974년부터 1994년까지는 김일성·김정일의 2중 정권시기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김정일은 제2인자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와는 지위가 달랐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김정일이 제2인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그는 처음부터 실권자였다.

여기서 나중에 김영주 부분을 황 선생은수정하게 되는데.. 요 는?


당시 김영주가 2인자라고 할만큼 위신이높았는데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그를 숙청, 내쫏은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김영주가몸이 너무 안좋아서 스스로 물러났다는
거다.

김일성이 몇번이고 만류했는데 고집을 부려 지방으로 가족도 안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것도 일반집으로.. 실제로 1972년인가?

7.4공동성명일때 김영주가 책임자로 됐는데 사실 김영주는 김일성한테 몸이 너무
안좋아서 거절을 했는데 들어주지 않아
어쩔수 없이 대표직을 맡았다.


나중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혹시 그가거짓말을 하나 떠볼려고 만찬 자리에서
김영주 한테 술을 권했는데 김영주가 거절을 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과 분위기를 이끌어 김영주 한테 한잔만 마실것을 권했다고 한다.

계속 거절하다 어쩔수 없이 술한잔을 들이켰는데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되면서 바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김영주는 병원 입원실에서 무려 14일이나 지나서야 깼는데 이런일을 들은 김일성이가 화가 뻗쳐서 김영주를 꾸짓었다고 하는데. 그리고 담배와 술을 금지 시켰다고한다.

후에 이후락의 글이나 대화에서도 나온
내용이다.

어쨋든 김정일이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자기의 정치강령으로 내놓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에는 "수령(김일성)의 유일적영도는 후계자(김정일)의 유일적 지도체제에 의하여서만 담보된다."는 것이 명기되었다.


이는 김정일의 영도적 지위를 법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일적 영도>와 <유일적 지도체제>라고 표현은 좀 달리 하였지만 진의도는 <김일성의 유일적영도는 김정일의 유일적 영도를 통하여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김정일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사소한 보고도 김일성에게 올라가지 못하게 되었고 김일성의 지시는 김정일을 통하지 않고는 아래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실현될 수도 없게 되었다.


첫 시기에는 김일성이 자기의 권력을 김정일에게 자진하여 넘겨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이 모든 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자 김일성도김정일을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김일성은 김정일의 <고문격>이 되고 말았다. 물론 김일성과 김정일은 부자지간이고, 또 김일성은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데 이해관계를 가졌고 김정일은 김일성의 권위를 이용하는데 이해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양자간의 모순이 표면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1974년부터 1985년경까지는 <김일성·김정일> 2중 정권시대였다고 볼 수 있고 1985년부터 1994년까지는 <김정일·김일성>의 2중 정권시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85년경부터 김정일은 사실상 모든 부문의 사업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대외적으로도 자기의 부하들을 통하여 자신이 최고지도자라는 사실을 선전하도록 하였다.


특히 1991년 그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된 다음부터는 정식으로 최고 권력의 승계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명령에는 전당과 전국가가 무조건 복종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김일성이 오히려 김정일의 눈치를 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992년 김정일의 생일 50돐에 즈음하여 김일성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으로 부왕이 왕세자를 칭송하는송시를 써 올렸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정치논리의 냉혹성을 보여 주는 산 실례로 된다. 김일성은 자기 아들에게 정권을 넘겨줌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였으며 자기 아들의 "권력"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만일 김일성이 1980년대 중반까지만 활동하고 한 생을 끝마쳤더라면 가짜 김일성이건, 진짜 김일성이건 관계없이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도 살아났을 것이며 해방후 북한의 지도자로서의 역사도 살아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자기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더불어 수치스러운 길을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생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김일성의 한 생을 그르치게 한 데에는 김일성 자신보다도 김정일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는 정권을 세습적으로 승계한 것이다.


이 문제에서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더 큰책임이 있겠는가? 일반적으로는 김일성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고 있지만이 문제에 있어서도 절반 이상의 책임이
김정일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부족점을 극복한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는 만큼 비록 계급적 독재는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여도 정권을 세습적으로 승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문제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상식을 깨고 북한에서는현실적으로 정권의 세습적 승계가 실현되었다. 는점에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더 말할나위도 없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 땅에서 군정훈련도받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기본에 대한 상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세습적으로 물려주는 문제를 처음부터 생각한것 같지는 않다.

그는 때때로 "공산주의자에게도 자기 자식이 더 귀여운 것만은 어떻게 할 수 없거든"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로서 자기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려는 민주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의 개인 독재기간이 장기화되고 정치적기반이 강화되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정권을 자기 개인의 소유물과 같이 여기는 사상이 자라나게 되었다.


김정일은 절대적인 독재자의 가정에서 그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라났다. 1949년에 생모인 김정숙이 사망한 후에는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라났다.

김일성의 후처(김성애)는 김일성에게 복무하던 여성이었으므로 처음부터 김정일에 대하여 계모의 입장에서 대한 것이 아니라 받들어 주는 입장에서 대하였다.


또한 김정일 스스로가 아버지에게 자기는 계모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아주미>로 부르겠다고 제기하여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김정일은 어릴 때부터 왕자와같이 행세하였으며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늘 자기를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의
대리인으로서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
였다.


그는 커가면서 자기 밸대로만 행동하는 품성이 더욱 자라나게 되었으며 이것이 아버지의 권력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굳어지게 된 것 같다.


이상..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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