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비교..(중)편

(중)편.


그러나 대체로 1974년부터 1985년경까지는 <김일성·김정일> 2중 정권시대였다고 볼 수 있고 1985년부터 1994년까지는 <김정일·김일성>의 2중 정권시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85년경부터 김정일은 사실상 모든 부문의 사업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대외적으로도 자기의 부하들을 통하여 자신이 최고지도자라는 사실을 선전하도록 하였다. 

 

특히 1991년 그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다음부터는 정식으로 최고 권력의 승계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명령에는 전당과 전국가가 무조건 복종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김일성이 오히려 김정일의 눈치를 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992년 김정일의 생일 50돐에 즈음하여 김일성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으로 부왕이 왕세자를 칭송하는 송시를 써 올렸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정치논리의 냉혹성을 보여 주는 산 실례로 된다. 김일성은 자기 아들에게 정권을 넘겨줌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였으며 자기 아들의 "권력"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만일 김일성이 1980년대 중반까지만 활동하고 한 생을 끝마쳤더라면 가짜 김일성이건, 진짜 김일성이건 관계없이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도 살아났을 것이며 해방후 북한의 지도자로서의 역사도 살아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자기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더불어 수치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생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김일성의 한 생을 그르치게 한 데에는 김일성 자신보다도 김정일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는 정권을 세습적으로 승계한 것이다.

 
이 문제에서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더 큰 책임이 있겠는가? 일반적으로는 김일성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고 있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도 절반 이상의 책임이 김정일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부족점을 극복한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는 만큼 비록 계급적 독재는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여도 정권을 세습적으로 승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문제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상식을 깨고 북한에서는 현실적으로 정권의 세습적 승계가 실현되었다는점에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 땅에서 군정훈련도 받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기본에 대한 상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세습적으로 물려주는 문제를 처음부터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때때로 "공산주의자에게도 자기 자식이 더 귀여운 것만은 어떻게 할 수 없거든"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로서 자기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려는 민주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의 개인 독재기간이 장기화되고 정치적 기반이 강화되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정권을 자기 개인의 소유물과 같이 여기는 사상이 자라나게 되었다.

 

김정일은 절대적인 독재자의 가정에서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라났다.   1949년에 생모인 김정숙이 사망한 후에는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라났다. 

 

김일성의 후처(김성애)는 김일성에게 복무하던 여성이었으므로 처음부터 김정일에 대하여 계모의 입장에서 대한 것이 아니라 받들어 주는 입장에서 대하였다.  

 

또한  김정일 스스로가  아버지에게 자기는 계모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아주미>로 부르겠다고 제기하여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김정일은 어릴 때부터 왕자와 같이 행세하였으며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늘 자기를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의 대리인으로서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그는 커가면서 자기 밸대로만 행동하는 품성이 더욱 자라나게 되었으며 이것이 아버지의 권력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굳어지게 된 것 같다.

 

1959년에 내가 김일성을 따라 모스크바에 갔을 때 김정일도 같이 갔다.   그는 나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그와 같이 생활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가 17세의 소년답지 않게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침에 김일성이 공식행사를 위하여 숙소를 떠날 때 자기가 직접 아버지의 몸을 부축하여 현관까지 모시고 나와 구두장에서 신발을 꺼내 신겨주었다. 

 

그때 김일성은 47세였는데 청년들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원기왕성하였으나 김정일이 몸을 부축해 주고 신발을 신겨주는데 대해 매우 만족해하였다.  

 

그리고 김정일은 저녁에 아버지가 숙소로 돌아올 때 반갑게 마중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김일성을 따라다니며 가까이에서 모시는 주치의사와 간호원, 부관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 그들이 김일성을 어떻게 모셨는가를 물어보고 다음날 계획과 주의사항을 이야기하여 주었다. 

 

김일성을 수행한 고위급 간부들이 많았으나 김정일은 아버지의 활동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지는 입장에서 하나하나 간섭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김정일이 앞으로 반드시 자기 삼촌을 내쫓고 자리에 앉게 될 것이며 혹 <그 이상의 것>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예감을 가졌다.  <그 이상의 것>이란 권력의 세습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때는 설마 그렇게 까지야 되지 않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때는 세습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니깐.. 나는 김정일에게 모스크바 종합대학에 유학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정치는 아버지에게서 배워야 하며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서는 유학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당시 김정일의 모든 언행으로 보아 권력을 세습적으로 승계 하는데 있어서는 김일성보다 김정일이 더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업적의 면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해보면 김일성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지적할 수 있지만, 김정일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면을 찾기 어렵다. 김일성의 혁명활동 즉, 일제때 항일무장투쟁은 사실이지만, 역사의 곳곳  왜곡하고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를 터무니없이 강화하여 정권을 김일성 일가의 세습정권으로 만든 주되는 책임도 김정일에게 있다. 

 

또 김일성의 영도 밑에 축성해 놓았던 자립적인 민족경제를 다 망쳐먹고 북한을 기아와 빈궁의 땅으로 전변시킨 주되는 책임도 김정일에게 있다.

 

그리고 북한의 문화를 수령절대주의 문화로 전환시킨 것도 김정일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북한 사회에 변형된 형태로나마 남아 있던 사회주의적 요소를 일소하고 북한 사회를 전체주의와 봉건주의를 결합시킨 전대미문의 개인독재체제로 전변시킨 책임이 바로 김정일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업적의 면에서 평가한다면: 김정일은 <제로>(0)도 못되고 <마이너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사업방법과 작풍의 면에서 김정일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독재자로서의 성격 면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해 보면 김일성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독재자라는 인상을 주지만, 김정일은 성격상 타고난 독재자 같이 보인다. 

 

김일성이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독재를 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김정일은 독재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나는 1958년부터 1965년 4월까지 김일성의 이론서기로서 당중앙에서 당생활을 하였다.  그때에는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가 당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내가 1979년에 당중앙의 비서로 다시 중앙당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김정일이 당사업을 주관하였다.   나는 오랜만에 중앙당으로 다시 돌아와서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진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의 중앙당 생활이 국가의 최고 수뇌부에서 사는 기쁨과 긍지를 주는 생활이었다면 다시 체험하게 된 중앙당 생활은 <독재의 고압선>바로 옆에 서 다칠세라 걱정하면서 잠시도 긴장성을 풀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생활이었다.

 

이전에는 중앙당 일군들의 당생활만 통제하는 본부 당위원회라는 상설적인 조직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시대에 와서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본부당 위원회가 신설되었으며 여기에는 중앙당 일군들의 조직생활을 지도하는 과와 사상생활을 지도하는 과 그리고 비밀정보사업을 지도하는 과 등을 두고 중앙당 일군들의 생활을 2중, 3중으로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김정일은 사람들이 화목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상한 성격이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도록 하고 오직 자기 한사람에게만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당조직 생활을 강화한다고 할 때에는 자기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규율을 엄격히 세우는 한편 회의를 열고 당원들이 서로 비판하게 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삼고 있다.  

 

상호비판에서는 김정일의 사상과 지시에 충실하였는가, 충실하지 못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상호비판이 강화되고 당원들이 격렬하게 싸울수록 김정일의 권위는 높아지게 된다. 

 

그는 당생활에서 무풍지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어떤 자그마한 결함이 나타나도 그것을 큰 사건과 같이 만들어(이것을 <사건화)라고 한다) 가지고 당세포들에서도 사상투쟁을 벌이게 하고 본부당적으로는 <대논쟁>과 <사상투쟁회의>를 빈번히 벌이도록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는 당원들의 생활을 잔잔한 상태에 두는 것을 반대하고 늘 풍파를 일으키고 들볶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  김일성은 회의에서도 긍정적인 예를 많이 들어 사람들을 고무해주고 부정적인 것은 적게 비판하였다. 

 

그는 늘 "긍정으로 감화하는 방법으로 부정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부정을 비판하는 것을 위주로 할 것을 요구하며 강한 상호비판의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진행되었을 때 회의가 <혁명적>분위기 속에서 잘 되었다고 높이 평가한다. 

 

또 회의에서 비판에 잘 참가하지 않는 사람을 혁명성이 없다고 배격하며 남의 결함을 목청을 돋구어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을 혁명성이 강하고 수령에게 충실한 당원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투쟁하는 것을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바라본다. 그러므로 본부 당위원회에서 중앙당적인 <사상투쟁회>나 <대논쟁>을 조직하도록 지시한 다음에는 자기 집무실에 앉아서 <텔레비죤>(폐쇄회로 화면)을 통하여 회의 정형을 자세히 살펴본다.

 

김정일은 정치적 지도에서는 각 부서들이 정책안을 제의서 형식으로 올려 비준(결재)받는 것을 제도화하였다.  그는 새로운 문제와 원칙적인 문제는 예외 없이 제의서를 제출하여 비준받도록 엄격한 제도를 세웠다. 

 

이것은 김일성때에는 거진 없었던 현상이다. 당중앙위원회 안에는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위시하여 여러 부서들이 있다.  부서에는 여러 개의 과가 있으며 몇 개과를 지도하는 부부장이 있다.

 

부서 책임자인 부장이 있고 몇 개 부서 또는 한 개 부서를 담당하여 지도하는 비서가 있다.  비서가 한 개 부서만 지도할 때에는 부장을 겸하게 되는데 대체로 큰 부서인 경우에 비서가 부장을 겸한다.  

 

큰 부서에는 자기 부문 사업에서 독자적으로 책임지는 제1부부장이 몇 명되기 때문에 부장이 여러명 있는 것과 같다.  제1부부장은 부부장과 동격이 아니라 부장과 동격이라고 볼 수 있다.

 

매개 과에서는 정책과 관련된 제의서 또는 정세자료보고를 작성하여 부부장, 부장을 거쳐 비서에게까지 올라와 통과되면 매주 한번씩 부서별로 문건을 김정일에게 올린다. 

 

현재는 그가 당총비서이지만 그 전에는 총비서대리인으로서 사실상 총비서나 다름 없었다.  당중앙 각 부서들에서 올리는 제의서들과 보고서들의 양은 방대하다.



       이상..   (하)편에서 계속~~^   ○ 마지막편.
 
내가사업한국제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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