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진실은 종지부 찍어야 한다.

※ 김일성의 항일운동논란, 이제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예전에 강만길 광복기념사업추진위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북 김일성 전 주석의항일 빨치산운동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김 전 주석이) 항일운동을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독립운동은 그 자체로서 독립운동으로 봐야하고,
사회주의 등을 따지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라고 대답한것을 언론매체에서 본적이 있다.

그때 이 발언에 대해 주요 언론들은 크게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인 12일당시 한나라당은 부대변인 명의의 논평을통해 “김일성이 항일운동가라면 국립묘지에라도 모실 것인가? 김일성을 항일운동가로 인정하는 강만길 위원장의 발언은 공인으로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발언”이라며 발언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심지어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 김학원 대표는 “한국전쟁을 일으켜 수 백만명의 동족을 학살한 사람을 독립운동가로 추앙하면서 떠받들어야한다는 강 위원장의주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기념사업추진위원 사퇴서를 제출하기까지 했다.

반민특위재판기록으로 확인된 김일성 귀순공작...

그러나 정치 공세 치고는 수준 이하의 발언들이 아닐 수 없다. 항일운동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과 국립묘지에 안장하거나 추앙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출범을 앞둔 시점에서 한나라당이나
자민련은 엉뚱한 정치공세 이전에 1949년 활동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재판기록부터 읽어야 할 것 같다.


문 : 김일성이라는 자는 어디 있는가?

답 : 현재 평양에 있는 김일성으로 인정합니다.

문 : 박차석 등이 살포한 서신과 사진은 어떤 내용이었나?

답 : 면회를 요청하는 서신과 이종락, 박차석 등의 실모(實貌)를 증명하는 2인 합촬(合撮)한 사진이었습니다.

문 : 언제, 어디서, 누구와 회견하였는가?

답 : 소화 15년(1940) 1월 중순 김일성으로부터 회신이 있은 지, 수일 후 김일성이지시한 장소인 두도화원(頭道花園) 남방약 5리 지점 산중을 향해 박차석이 단신으로 들어가 김일성 이하 2개 중대, 약 120명과 1박하며 직접 김일성과 회담을 시켰습니다.

문 : 박차석과 김일성의 회담내용은 무엇이었나?

답 : 박차석이 삼강성 귀순공작의 4대 조건을 설명하고 또 혁명대상은 초목이 아니라 인간이니 하산하라는 의미와 귀순 후
특별한 조치로 외국유학을 알선한다는 등의 조건으로 귀순을 역설하였던 바 김일성이 귀순의사를 표시하며 2대 조건을 요구하여 왔었습니다.

문 : 2대 조건은 무엇이었나?

답 : 제1은 귀순공작의 책임자인 김창영(피의자)을 간도성, 혹은 '통화성의 성장'으로 임명해 귀순후 오랫동안 일동의
신변을 보장할 것,


제2는 동 성내에 적당한 지역을 택해 귀농생활을 하되 일반행정에 대해서는 만주국법에 전반적으로 순응하나 치안과 경무에대해서만은 정부에서 간섭치 말고 귀순부대에 일임해 줄 것 등이었습니다.

1949년 4월 16일, 반민특위 충북 조사부에서 제2차 피의자신문을 받으면서 신정호 조사관의 질문에 대해 김창영(金昌永·1890∼?)이 대답한 내용이다.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이날 조사를 받은 김창영은
일제 때 총독부 군수·경시 등을 거쳐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항일운동가들의귀순공작 및 토벌 책임자를 지낸 친일파다.

그가 ‘김일성귀순공작’을 지휘했던 것은만주국 치안부 이사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1939년 가을 직속상관인 만주국 치안부 차장으로부터 만주국 사법부,
치안부, 관동군 공동결정이라며 김일성 귀순공작을 성사시키라는 특명을 받았다.


그가 인정한 것처럼 당시 김 주석은 만주지역 반일연합군으로 1936년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이었다. 김 주석도 자신의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7권)에서 “내가 겪은 수많은체험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체험” 이라며자신에 대한 일제의 귀순공작을 언급해 놓았다.

특명을 받은 그는 우선 김일성과 가까운
인물을 수소문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환된 인물이 이종락(李宗洛)과 박차석(朴且石)이었다. 두 사람은 김 주석이 1926년길림에 왔을 때 첫 인연을 맺었고 그후 4~5년간을 같이 활동한 사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30년대 초 국내에 침투했다가 체포돼 전향했다. 김일성은 두 사람에 대해 “화성의숙에도 같이 다니고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와 건설동지사도 같이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을 꾸릴 때에도 같이 활동한 사람들”이라며 “박차석과 이종락은내가 혁명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사귄 동지인 동시에 첫 동행자들”이라고 회고했다. 그만큼 두 사람은 김일성과는 각별한인연이 있는 친밀한 사이였다.

김창영은 바로 이점을 이용했다. 1단계로그는 김일성부대가 잠복할만한 산간 촌락일원에 이종락과 박차석의 서신과 사진을뿌렸다. 김일성과 연락이 닿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약 2개월 후 김일성부대로부터 답신이 왔다. 이후 진행상황은 조사관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박차석의 귀순권유에 대해 김 주석은 거짓으로 귀순의사를 표명하며 역으로 김창영을 난처하게 만들거나 관동군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두개의 조건을 내걸어 상대방의 의중을 타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주석은 이때 박차석을 만난 인상에 대해 그의 회고록에서 “겉모양은 여전한데속은 딴사람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김 주석은 “사람답게 살라”는 충고를 해주고 그를 그냥 돌려보냈다. 그가 귀순공작에는
참여했지만 마지못해 하는 것이고 의식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거나 자신의 영달을 누리려고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중에서 돌아온 박차석이 김일성의 두 가지 조건을 전달하자 김창영은 1단계 공작이 실패했다고 판단, 2단계로 이종락을 김일성부대에 다시 들여보냈다. 이종락은 김일성과 만나 두 가지 조건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무조건 귀순 후 매사를 타협적으로 진행하자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이종락은 김 주석을 만난 후 ‘불귀의 객’이 돼 버렸다. 해방 직후, 한 기자와가진 인터뷰에서 김 주석은 “이종락이 한번 찾아왔기에 손님으로 잘 대접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말라고 잘 타일렀는데도 전연 뉘우치는 빛이 없고, 도리어 안 될 말만하기에 죽여버리게 하고 말았지요”라고
말했다.

이후 김 주석이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서
그와 김창영의 관계는 단절됐다. 그로부터 10년 후 김일성은 북 정부의 수상이 됐고,그를 귀순시키려던 김창영은 반민특위의재판정에 서게 된다.

김 주석에 대한 김창영의 진술은 해방 후 ‘김일성 가짜설’을 유포시켰던 친일파의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이북 문서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 비밀문서까지 부정하는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가장 ‘충격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다.


1972년 평양을 방문해 ‘7·4남북공동성명’에 합의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의항일투쟁을 담은 오페라를 본 후 자신도
김일성 수상이 항일투쟁을 했던 심정으로평양에 왔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학자들을 동원해 ‘김일성 가짜설’을 체계화하는데 앞장섰던 이후락의 발언이라는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김형직 항일운동사료, 독립기념관 소장

사실 독립기념관에는 김 주석의 항일운동의 입증해주는 중국공산당의 비밀문건을비롯해 김일성 주석의 부친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부인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이 항일 비밀결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음을 입증하는 사료가 다양하게소장돼 있다.

이미 1989년에 김형직이 활동했던 "조선국민회"에 대한 연구논문이 나왔고, 함께활동했던 배민수(裵敏洙, 1896~1968))의 자서전 속에도 김형직에 대한 기록은
빈번하게 나온다. 일제시기와 해방 후 기독교 민족운동사, 농촌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장로교 목사였던 배민수는 김형직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항상 눈물로 기도하였다. 어떻게조국을 해방시킬 것인가 하는 것만이 우리의 관심사이자 희망이었다. 우리 삶에서
애국심 이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않았다.(배민수 자서전, 92쪽)”

배민수는 1913년 여름 김형직의 제안으로 평양 기자묘 숲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서하는 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 외에도 '조선국민회'에 대한 여러 일제자료들이 있지만 북에 대해
적대적 인식을 갖고 있는 일부 사람들만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북은 이미 대화의 상대이자 통일의 상대이며, 화해하고 협력해야 할 동반자
관계로 변화됐다. 그런 점에서 북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 주석의 항일활동도 이제는 역사적 평가를 사실 그대로, 미화차원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예전에 MBC가 400명의 네티즌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해 본 결과 49%가 ‘김일성의 항일투쟁경력이 사실’이라고 대답했고, 51%가 ‘사실이라면 높게 평가해야 한다’라고 응답했다. 특히 과거 ‘냉전세대’와 달리 최근의 젊은 세대 대다수는 ‘김일성가짜설’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다만 이 조사에서 1/3 이상의 네티즌이 여전히 ‘김일성의 활동이 가짜’라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인터넷상에 떠 있는 잘못된자료와 ‘냉전세대’의 영향의 크다는 것을보여준다.

실제로 네티즌들이 많이 이용하는 네이버사전에서 ‘김일성의 약력’을 검색해 보면 ‘소련에서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1945년 소련군 소좌가 됐고, 8·15광복
후 평양으로 들어와 10월 14일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 시민들 앞에서 ‘김일성 장군’이라고 그를 둔갑시켜 소개한
뒤부터 김일성으로 행세하였다’라고 기술돼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이 수정되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 네티즌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의 현대사 교재 뿐만 아니라
이미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까지 김 주석의 항일활동을 기술하고 있는 마당에 이런 인식이나 서술은 하루속히 바꿔야 할 것이다.

● 사회주의 항일운동가도 포상


국가보훈처는 예전에 3·1절을 맞아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벌였지만 그동안 사회주의계열이라고 해서 서훈 대상에서 제외됐던 여운형, 권오설, 조동호, 김재봉 등을 국가유공자로 포상했던건 다 알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심사를 맡았던 신용하 국가유공자 공적심사위원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이라고 해서 공적을 제외하는 것은부당하다는 학계의 오래된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역사에서 높게 평가받을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우전(金祐銓) 광복회장도 “우리 독립운동사는 공산주의 독립운동사나 민족주의독립운동사나 다 우리 민족사로 볼 때 귀중한 역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뭘 비하하거나 배척하거나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평가나 해석의 차이를 내세우기에 앞서 정확한 사실,사실 인식이 우선돼야 하고, 그런 점에서 ‘김 주석의 항일운동 논란’은 이제 더 이상 가치가 없으며 종지부를 찍을때가 됐다.



이상....




덧글

  • 광주폭동론 2021/06/27 23:16 # 답글

    전두환도 내심으로는 김일성의 항일운동을 인정하였었죠. 기독교인 이승만은 얼마나 못났길래 전쟁 중에도 의열단에게 총맞아 죽을 뻔했을까요?
    http://qindex.info/i.php?x=1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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