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재평가.03편..러시아 자료를 중심으로

03편.


●  스탈린, 한국전쟁에의 중국 참전 유도



스탈린이 1950년 1월 30 김일성의 남

침계획을 승인한 배경에는 스탈린 자신이

설명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우려한 바와 같

 1949년 기간 중에 있은 국제환경 변화

가 있었다. 소련이 미국과 함께 원자탄을

보유하게 되고 중국공산혁명의 성취로 아

시아 지역에서 전략적 상황이 공산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기

에 미국이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음을 선언하자 스탈린은 세계적화전략

의 일환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

이러한 견해가 이제까지 전통적 견해가

되어왔다
.


이러한 견해는 소련의 대중국 관계에 대하

여는 내색을 하지 않고 ‘국제환경 변화’만

을 언급한 스탈린의 말을 고지식하게 믿고

그의 진의를 간과하는 것이다
.


독일 동구·국제문제 연방연구소 하인지그(

Dieter Heinzig)
부소장이 러시아대통령

실 문서고에서 직접 열람한 1956년 3월 3

1
 북경 주재 유딘 대사의 모택동 면담

기록 원본에 의하면, 모택동은 “[1949 1

2
월부터 1950 2월 모스크바 방문 시] 

스탈린과 북한을 강화하는 문제에 대하여

는 의논이 있었지만 남한정복문제에 대하

여는 전혀 협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한국 전쟁에 대하여 마오

쩌둥과 먼저 협의하였다. 1949년부터 12

부터 1950 2월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후반기에 북한의 남한 공격의 실현

가능성에 대하여 토의를 했다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소련비밀문서 공개 시 중요한 역할을 한

볼코고노프(D.Volkogonov) 장군은 마오

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시 스탈린과 1950

초 여름이 대만과 한반도문제를 완전히

결정짓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소련이 직접 싸우지 않고 중국을 내세우려

는 의도를 가진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한반

도 전쟁을 개략적으로 합의한 후 김일성에

게 중국 동의 조건 부 한국전쟁 개시 승인

을 하였으며 한국전 개전 후 중국을 한국

전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필사적 노력을 하

였다.


1950 5 14자 스탈린의 모택동 앞

전문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김일성이 48

에 걸쳐 남침 승인 간청 전문을 보낸 후

1950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을 때 스

탈린은 “변화된 국제환경” 때문에 군사력

에 의한 김일성의 통일을 승인한다고 하면

  
“남침에 대한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

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이 동의하

지 않으면 미루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한 것은 앞에서 제시한 바 있다
.


구 소련 공산당 국제부의 김일성의 소련방

문에 관한 보고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195

0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해온 김일성에게

소련이 전쟁에 직접 참여해줄 것으로 기대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소련이 서쪽 방

면에서 대처해야 할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고 미국이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직접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은 중국 지도부가 이

를 찬성할 때만 개시될 수 있음을 강조하

였으며 5 14일에는 마오쩌둥에게 이를

확인해 주었다.


스탈린은 한국과 유엔군의 반격 특히 미군

기의 공습으로 김일성의 사기가 저하되고 

세가 북한군에게 불리하게 되자 다시 중

공군의 참전을 중국지도부에 촉구하였다. 


1
950년 7월 5
 스탈린이 중국 주재 로신

대사를 통하여  저우언라이(周恩來)외상

에게 보낸 암호전문은 한국전쟁 참전여부

를 협의 결정하기 위하여 7월 중순 개최된

중국 공산당 지도부 회의에 앞서 중국지도

부가 중공군의 한·만 국경지대로의 이동문

제를 스탈린과 협의한 것을 밝히고 있다. 


탈린은 동 전문에서 적군 (한국군과 UN

) 38선을 넘게 될 경우 북한군을 돕기

위하여 중공군 9개 사단을 한 만 국경지대

에 집결 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면서

이들에 대한 공중엄호를 약속하였다. 


7
 13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중공군 9개 사단 엄호를 위하여

제트기 124대로 구성된 1개 항공사단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 2-3 개월간 중국 측 조

종사 훈련과 훈련 후 장비 이전을 통보하였다.


9 16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

군이 후퇴를 거듭함에 따라 절망상태에 빠

 김일성은 9 28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

위원회를 개최, 적군이 38선을 돌파하게

되면 소련군이 직접 지원해줄 것과 소련군

의 직접지원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중국과

기타 공산 국가들로 국제의용군을 조직,

원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스탈린

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스탈린은 101 새벽 2 50분에 9

29일자 김일성 박헌영 공동 명의 전문을

받고 3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최

소한 5~6개 사단의 중국 의용군을 38

방향으로 진격시켜 북한군을 지원해줄 것

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송 하였다.


상기 스탈린의 중국 참전 요청 전문에 대

하여 마오쩌둥은
 10 2일자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중국은 최초 적군이
 38

선을 돌파할 경우 의용군 4개 사단을 파견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 여타 지도자

들과 세부검토를 한 결과
 ○ 중공군의 준

비 부족
, 

○  중공군 참전 시 미 중 전쟁이 될 가능성

및 이 경우 중 소 동맹조약에 의거
, 소련군

의 참전 불가피
,  


○  
중공군 참전 시 미국의 중국 내 반동세

력 준동 사주 가능성 등의 이유를 내세워

당분간은 의용군을 파견치 않고 인내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앞으로 북한군

은 유격전 형태로 투쟁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


이에 대하여 10 5

스탈린은
마오쩌둥


과 저우언라이에게 보내

는 전문에서 미국

은 현 상태에서는 큰 전

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일본은

군사적 잠재력은 있

으나 아직 회복되지 않

은 상태이므로 소련

을 배후에 둔 중국의용

군 참전은
  한반도

문제를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미국이 양

보토록 압박하고 한반도

가 대륙침략의 도

약대가 될 가능성을 사

전 방지할 수 있으

며 미국으로 하여금 대

만을 포기케 할 것

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촉

구하였다
.



스탈린은 이어 10 8 김일성에게 보내

는 전문에서 마오쩌둥이 10 7 9개 사

단을 조만간 북한에 파견할 예정임을 자신

에게 알려왔음을 통보하면서 김일성이 적

군과의 전투에서 결연히 임할 것을 촉구하

였다. 


마오쩌둥도 10 8일 밤 평양주재 중국대

사를 통하여 중공의용군의 참전을 김일성

에게 통보하였다.


《 그러나 10 9-10일간 중국의 북한지원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하여 소련

을 방문한 저우언라이와 린뱌오(林彪)

여러 이유를 내세워 마오쩌둥의 참전결정

을 번복 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스탈린은

위험을 무릅쓰고 최후카드를 제시하였다.

10
 13일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 지원에

대하여 미국이 중국을 공격 보복할 가능성

이 없으나 지금 중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북한은 매우 짧은 시일 내에 붕괴될 것이

므로 중국은 중국 북동지역에 북한인민군

을 재배치하고 소련은 연해주 지역에 북한

계 소련인과 부상병, 노약자를 이동시켜

북한 재진입을 위한 피난처를 각기 제공하

자고 하면서 일단 북한을 포기하는 최종

제의를 중국 측에 하고 10 13일 쉬티코

프 대사를 통하여 북한군 철수계획을 김일

성에게 실제로 제시함으로써 마오쩌둥의

한국전쟁 참전 최종 결심을 유도하였다.》



스탈린은 이와 같이  중국을 한국전쟁에

필사적으로 끌어들이도록 노력을 하였으

마지막에는 북한 포기라는 최악의 상황

을 제시하여
중공의 한국전 참전을 얻어

내었다
.



1950 11월 미 공군이 미그기를 격추함

으로써 알 수 있게 되었지만, 한국전쟁 개

전 전부터 군사고문을 북한에 파견하고 있

던 스탈린은 중공 지상군이 한반도에 진입

할 무렵
중공군을 유엔군 전투기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소련 전투기들은 중공 국

적표지를
, 조종사들은 중공 공군복을 입는

등 중공 전투기로 위장하여 실제로 참전시

켰다
. 



그들은 주로 청천강 이북~압록강 이남지

역에서
 '미그회랑'에서 유엔 전투기와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고 방공요격 임무에

치중했다
.



《 당시 미국은 소련 공군의 철저한 위장

으로

인해 중공 공군으로 인식했고 이러한 인식

은 이후 상당기간 지속되었으며 1953년 7

27
 정전 때까지 소련은 14개 전투비

행사단 2 6000명의 병력을 선양, 안산, 

(현재 단둥) 등 중공군 기지에 주둔시

켰고,  6 3229회 출격해 1790 여회의

공중전을 벌였으며 모두 335대의 비행기

 120명의 조종사를 잃었다는 사실이 공

개된 소련 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
계속)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