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의롭지 못한 전쟁인가.? 02편. 시리즈

02편.



● 남한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요새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에 대해 사람들이 종종 공유하는가정 중 하나는,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남한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당시 남한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이승만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 망명해 있었는데,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하면서 남한으로 귀국하여 미군정 지배 아래에서 권력을 잡았다.


이미 한국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정부가형성되어가고 있었던 중이었는데도, 미국과 이승만은 그러한 움직임을 억제하고 성장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순수 '자유주의적인(libertarian)' 관점에서 해석해보자면, 이는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정부
구성과 영향력을 미국이 통제하는 것이고, 따라서 "한국을 공동의 적인 일본과 함께맞서싸운 동료국가가 아니라 마치 일본에협조한 패전국가처럼 다루는" 처사와 다름이 없었다.


이승만과 미군정은 자유시장과 자유기업을 촉진하려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식민지 이후의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그들이
시도했던 방식은 효과적이지 못했을 뿐더러 심지어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예컨대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후, 남한정부는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이 보유했던많은 양의 자본과 자산을 매각했다.※ 참고로 :《 이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전용덕미제스 아카데미 학장의 저서 <국가주의시대의 경제와 사회>를 참조하라. 해방 직후 미군정기 때부터 박정희 집권기에 이르기까지 경제를 오스트로-리버테리어니즘(austro-libertarianism)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특히 이승만의 경제정책에 대한평가(수입대체산업화)도 찾아볼 수 있을것이다. <국가주의 시대의 경제와 사회 1편> 366p.참조] 그런데 일제강점기 당시의 환경을 고려해본다면, 일본의 조선 병합에 협력하거나 그로부터 이익을 얻은 '친일파'들이 그러한 매각 자본 및 자산을 구매할 여력이 더 많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피해자인 보통 사람이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이익을 얻은 친일파들이 더 부유해지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소속이었던 경성대학 총장 알프레드 크로프츠(Alfred Crofts)는 "국가의 부의 절반을 (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부패가빠르게 일어났다"고 기술하였다. 더 끔찍했던 점은, 미국이 친일파와 심지어 일본인들 까지도 새로운 남한 정부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싸워왔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전형적인 냉전시기 사고방식 때문에,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은 공산주의자로 추정되었고, 언론인 존 건터(John Gunther)가 보도하기를, "극우주의자가 아니었던 한국인들은 대체로 공산주의자였거나 잠재적인 반역자였다." 또 외교정책평론가 윌리엄 블럼(William Blum)에 따르면, "1950년 초까지 이승만은 정직하게 선거를 치루는 것을 꺼려했으며, 제대로된 선거를 치루지 않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미국 관료들에 대해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그리고 1950년 5월 30일의 선거 결과가보여주듯이, 이승만의 정당은 국회에 대한 장악력을 잃게 되었다.참고로:《 1950년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반민특위 문제등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이승만은 국회의원 선거를 연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미국의 관리, 즉 딘 애치슨 장관이 선거를 치루지 않으면 경제적 원조를 끊겠다고 경고하자 이승만은 하는 수 없이 선거를 치루었다. 이승만의 정당이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전체 의석에서 겨우 14석(6.7%)만 차지하는 결과를 얻었고 야당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선거 결과의 영향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있던 의원 4명을 제외하고나머지는 반(反) 이승만 정당인 대한국민당으로 이탈하거나 무소속으로 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이로 인해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는 다음 선거에서(1953년 제3대 국회의원선거) 이승만이 자유당을 창당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다시 국회를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친일파 청산의 실패와 이승만의 독재정치로 인해 1946년부터 대중은 분노했고 게릴라의 무력 저항까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대사관 노동담당관 스탠리 얼(Stanley Earl)은 "북한이 남침하지 않았더라도 이승만 정부에 대한 반란이 남한 내부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 주한 미국대사관 부영사였던 그레고리핸더슨(Gregory Henderson) 역시 게릴라와의 전쟁 중에 이승만의 손에 의해 "약10만 명 이상이 아무런 재판도 받지 못한채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시카고 선 타임스(Chicago Sun-Times)'의 기고가 마크 게인(Mark Gayn)의 진술은 더 슬픈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한국정부가 게릴라를 소탕하는데 미군이 협조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발포하고, 대규모 집단 체포를 하고, 용의자들을 찾기 위해 산간을 샅샅이 수색하고, 대규모 급습을 위해 우익주의자들, 경비대, 경찰을 조직했다. 이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존 건터는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한국 교도소에서는 약 1만 4천 명의 정치범들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 참고:《 본 글에서 극우주의자들이나우파와 같은 단어가 종종 보일 것이다. 사실 이승만 시절에 활동했던 이승만계열의정치인들이나 정당들을 우파나 극우라고분류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이러한 개념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스펙트럼을 국가와 개인 도식으로 나누어서 볼 때 극우는 아나코 캐피탈리스트(Anarcho-capitalist)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시대에 아나코 캐피탈리스트는 한국 정치사에서 그 어디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다소 온건한 우파 역시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존재했더라면, 한국 정치사에서적어도 제한된 정부와 같은 개념이나 구호가 등장했을 것이다. 이승만 시대 그리고현재에 이르기까지 우파는 사실 우파가 아닌, 기회주의적 정실자본주의자 혹은 국가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에 철저히 정부에 빌붙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고 사상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무자비함과 함께 한국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심화시켰다. 그 결과한국 내 공산주의자들의 성장을 촉진시키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 오직 북한만이 전쟁 책임이 있고 남한은 무고한가?


윌리엄 블럼은 "한국전쟁은 명백하게 북한이 남한을 명분없이 침략한 사례였다.
나쁜놈(북한)이 더 착한놈(미국)의 보호를 받는 착한놈(남한)을 공격한 사건이다" 라고 말하였다.

북한이 무고한 남한을 부당하게 침략했다는 낭설은 한국전쟁을 평가할 때 흔히 저지르는 오해 혹은 가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일반화는 근거가 없다. 많은 사람은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갑작스럽게 이유 없이 남한을 침공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실제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당시 한반도는 38선 경계선을 중심으로 수개월동안 반복되는 분쟁을 겪고 있었다. 예컨대 미국의 외교관 필립 제섭(Philip C. Jessup)이 남침 2달 전인 1950년 4월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남한군과 북한군이 서로 침입하는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정말로 심각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아마 1천 명 내기 2천 명 정도가 동원되고 있다." 또한, 북한의 공식적인 발표는 "1949년
한 해에만 남한군 혹은 남한경찰이 2,617건의 무장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사회 혼란과 불안을 야기할 목적으로 살인, 납치,약탈, 방화 행위를 저질렀다" 고 보도했다.


더군다나, ~~

[ 북한은 6.25 전쟁 발발 이틀 전인 6월 23일과 24일 양일간 이루어진 남한군의 포격과 25일에 행해진 해주에 대한 기습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남침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여기서 참고:《 해주공격설은 현재 학계에서 큰 지지를 얻지 못하고있다.] 이는 남한의 6월 26일 현지 보도와도 일치하는 사실이다. UN이 추후에 한국전쟁의 책임으로 북한의 단독 침략을 주장했음에도, 그 당시에는 "현장에 있는 UN군사감시단 혹은 서울 소재 UN 한국 위원회 등 어떤 UN 단체도 적대행위의 발발을 목격하지 못했다" 고 주장했음을 고려할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북한의 남침을 완전히 새롭고 전례 없는 전쟁의 개시보다는 "현재 진행 중이었던 내전의 본격적 확대" 그 이상이 아님을 인지할 필요가 있을것이다. ※ 참고 :《 이러한 부류의 수정주의적 주장은 한국전쟁이 평화롭다가 갑자기 1950년 6월 25일에 불현듯 일어난 사건이라는 기존의 통설에 이견을 제시하면서, 1945년 해방 이후 수많은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기때문에, 통설처럼 북한만이 전면전의 원인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고, 남한과 미국도 전면전까지 일어난 데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지, 북한은 평화롭게 조용히 살았는데 갑자기 남한 군대가 북침을 했거나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이 아니다.]


이상... 다음편에서~
1950년1월미국무부는


덧글

  • 광주폭동론 2021/07/23 14:32 # 답글

    일본군, 미군 그리고 국군 모두 위안부가 있었는데 인민군과 인민해방군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 쪽이 정의의 편이었는지 기독교는 괴변을 늘어놓지 말고 솔직하게 까놓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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