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의롭지 못한 전쟁인가.?? (03편).마지막편

03편.        (마지막편)


1950년 1월, 미 국무부는 미국의 방어경계(애치슨 라인)에 일본과 필리핀은 포함되지만 남한은 제외되었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중 하나는 물론 군사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이유로 남한 대통령 이승만의 반대를 들어볼 수 있다. 이승만은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거듭 요구해왔고, 전쟁이 공식적으로 발발하기 일보 직전인 1950년 6월 까지만 해도 여전히 북진을 주장했다.

뉴욕타임스는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의 동의를 받을 수 있었다면 남한군이 북한을 침공할 것임을 여러 차례 시사했다"면서 "기이하게도 전쟁에 관한 이야기들은 거의 모두 남한의 지도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보도했다.

존 로버츠(John Roberts) 장군 역시 남한군이 강력해질 경우 북한을 침공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남한이 방어용으로 무장하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

라스바드에 따르면, "하원의원 하워드 버핏(Howard Buffett)은 한국전쟁의 발발에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확신했다. 그는 평생동안 상원 군사위원회가 한국전쟁 당시 CIA 국장이었던 힐렌쾨터(Roscoe H. Hillenkoeter)의 증언을 기밀 해제하도록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버핏은 나에게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 너무 확실하다고 말하였다."


한국이 미국 방위권 밖에 놓여 있다는 애치슨 선언과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가 동북아시아의 공산주의 반발을 초래하고 확대시켰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북한의 남침은 스탈린에 의해 승인받았지만, 처음에 스탈린은 북한의 요구를 계속 반대했었는데, 추후에 그의 두려움과 우려는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런던정경대의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주복(Vladislav Zubok)은
 "스탈린은 미국이 재건된 일본과 동맹을 맺고 남한을 아시아 대륙의 진입을 위한 전초기지로 변모시킬 것으로 예상했다"고 진술하는데, 결국 북한의 남침 자체가 남한을 그렇게 만들고 말았다.


●  중공의 참전과 전쟁의 비극적인 확대


단순히 공군을 투입해 폭격하는 것만으로는 북한의 진격을 막지 못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미 육군의 참전을 명령하였다. 남한군과 미군은 연합하며 북한군을 다시 38선 이북의 원래 영역으로 효과적으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트루먼은 그 지점에서 멈추는 대신에, 북한 전역을 점령하려고 시도하며 한국전쟁이 왜 냉전의 첫 중요 사건인지 몸소 보여주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이 과민반응은 장기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고 말았다.


유엔군이 북진을 감행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공 국경에도 더 가까이 접근하기 시작했고, 중공은 자기들 국경으로부터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반복적으로 경고해왔다. 그러나 전쟁의 여파가 중공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심각해지자, 그들은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중공의 참전으로 인한 확전은 한국전쟁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다. 한때 맥아더 장군도 "크리스마스까지 미군을 집으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희망을 가졌었지만, 오스트리아학파 역사학자 랄프 라이코(Ralph Raico)에 따르면, 중공의 참전으로 인해 "전쟁에 의한 미군의 피해가 3년이나 더 연장되고 말았다." 

국경 인근에는 생물학전 또는 세균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윌리어 블럼 박사는 "특히 1952년 1월부터 3월까지, 미국은 남한과 중국 동북부 지역에 박테리아와 세균을 많이 투하했으며, 중공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과학자들의 국제적 연구는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는 점을 밝혀내었다: 

"한국과 중공의 국민들 모두 세균전의 피해자였다." 북한의 남침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의 경찰'이 되어야만 했던 미국이 그 관리 대상에 (이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중공까지 포함했다는 것은, 중공에 대한 미국의 군사력 사용이 비열하고 부당할 뿐만 아니라, 본래 설정된 전쟁의 목표로부터도 상당한 이탈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  전쟁으로 한국이나 세계의 형편이 나아졌을까?


한국전쟁의 긍정적인 면으로, 종종 이 전쟁을 통해 남한이 공산주의의 폭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되었고, 안전해졌으며, 번영하게 되었다는 점이 언급된다.

다시 말해, 북한으로부터 남한을 방어하기 위한 미국의 개입이 억압적인 지배구조(공산주의)로부터 남한을 효과적으로 보호했으며,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가 정착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남한 보호가 민주주의를 배양했다는 순진한 믿음은 근거가 없으며 역사적 사실과 충돌한다.


우리는 이미 미군정의 정치적 통제가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질서를 명백하게 억압했음을 목도하였다. 이러한 통제는 1961년 이후에야 마침내 중단되었는데, 그럼에도 남한 사람들은 미국을 따라 민주주의를 선택하는 대신에 다시 독재자의 통제받는 것을 선택하였다. 
[참고: 박정희는 분명 반란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반역자였지만, 형식적인 선거를 통해 국민 다수의 지지를 확인하였다.] 

이승만의 뒤를 이은 것은 민주 정부가 아니라 박정희 소장이 통치하는 군사독재정권이었고, 1979년에 김재규에 의해 살해될 때까지 그 독재가 지속되었다. 이후 두 번의 쿠데타가 잇따라 발생하며 전두환의 새로운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는데, 이에 저항하며 광주에서는 무장봉기가 있었고, 다른 길거리 시위에서도 유혈이 낭자했었다.

1985년 이후에는 상황이 조금 안정되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남한의 체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남한의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미국은 남한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16년 동안이나 교육했지만 결국 실패하였고, 미국이 남한 내정에 구체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중단하고 25년이 지난 뒤에야 스스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다." 》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사안은, 애당초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한국인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뿐이라는 불편한 진실이다.

에밋 오도넬(Emmett O’Donnell) 장군이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증언한 바 처럼,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재산과 인명을 비참하고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영국 해군이 발간하는 <브래시 연감(Brassey’s Annual)>은 1951년에 한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한국은 더 이상 국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들은 파괴가 되었으며 수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다. 한국인들은 원조에 의존하는 집단으로 몰락했으며 파괴적인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우리는 전쟁이 끝났을 때 남한 사람들로부터 감사받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위해 파괴하는 것이 유해무익하다는 교훈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전쟁은 이후 베트남전에서 악명높아진 네이팜탄이 사상 최초로 사용된 본격적 전장으로서 그 효력이 입증된 장소였기도 했다. [참고: 한국전쟁의 비참한 결과를 목도하고도 대한민국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미국에 의한 베트남 침략전쟁에 개입하여 미국 제국주의, 양민학살 및 민간인 강간에 일조하며 가해자가 된 피해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전쟁의 비용 역시 엄청난 수준이었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리처드 에벨링(Richard Ebeling)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54,250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고 103,3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으며, 미 공군의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장군은 "우리는 북한과 남한의 거의 모든 도시를 불태웠고,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을 죽였으며, 수백만 명을 난민으로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또 북한의 후방으로 침투한 CIA의 작전 역시 적지 않은 숫자인 1500명 가량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참고: 대한민국의 경우, 약 15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71만명이 부상당했으며, 13만명이 실종되었다. 민간인은 약 37만명이 사망하고, 23만명이 부상당했으며, 30만명이 실종되었다. 미국의 집중 폭격을 당한 북한과 중공의 경우 피해가 보다 큰 편이다.]


어떻게 보면 즉각적인 물리적 비용보다 더 심각했던 것이 외교적 비용이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적대관계를 공고히 했으며, 냉전의 격화를 야기하였다.

랄프 라이코는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정복 계획의 일환으로 잘못 해석한 결과, 냉전은 급격하게 군사화되어 본격적인 재래식 무기 및 핵군비 경쟁이 시작되었으며, 더 많은 동맹국을 확보하려는 광란의 경쟁, 그리고 해외 군사 기지의 건설 등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결론지었다.

전쟁이 끝나기 거의 직전에는 맥아더 장군조차도 
"한국과 독일에서의 선거를 통한 재통일을 받아들이고, 한국, 독일, 일본에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는 방안을 소련에 제안함으로써 냉전 자체를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대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만약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 충고를 받아들였더라면, 냉전의 모든 당사자들이 그후 수십년간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  결론적으로~~


19세기의 미국 역시 남북전쟁을 치룬 적이 있었다. 한국, 중국, 혹은 어떤 다른 외세가 미국인을 학살하기 위해 우리 땅에 군대를 보낸 적이 있었는가? 여전히 많은 미국인이 한국전쟁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 제시된 사실들을 제대로 인지함으로써, 한국전쟁의 가짜 명예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글을 계기로 미국 역사 전체의 모든 전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가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상.;      끝


덧글

  • 광주폭동론 2021/07/30 15:01 # 답글

    해방이나 통일이라는 명분은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피해가 너무 컸고 결과적으로 해방과 통일로부터도 멀어졌으니 역사적 책임은 피할 수 없죠.
  • 無碍子 2021/07/30 20:25 # 답글

    독립전쟁을 제외하고 의롭게 선빵을 날린 전쟁이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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