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의 구체적인 6.25의 분석..02편

02편..          




미국은 한국전쟁이 일어나 공군력이 늘어났는데도 새로운 공군기지를 건설할 필요가 없었다.또한 미국은 일본의 군수산업을 다시 살려내기 위한 노력에 힘을 쏟았다. 맥아더의 경제고문으로 임명된 덕지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일본의 조세수입을 군수품생산으로 돌릴 수 있는 ≪대충자금 특별회계법≫을 1949년 4월 16일 일본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일본의 군수산업은 전쟁 뒤 전쟁도발을 막기 이해 몰수하도록 되어있었는데 예정된 군수산업 가운데 겨우 30%만이 몰수되었을 때 배상몰수조치를 중단하였다.


몰수되지 않은 공자의 72%가 미국의 방위청부업자의 직접지휘 아래 즉각 군수품 생산에 들어갔으며, 한국전쟁이 일어난 6개월 뒤인 1951년 1월경에는 일본의 군수품생산능력의 80~%가 무기 제조와 수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경제 안에 군산복합체의 싹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일본은 튼튼한 미국의 병참기지이자 아시아의 반공을 위한 무기고로 자리잡게 되었다. 1949년 뒤 진행된 일본의 병참기지화 과정이 한국전쟁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지, 또한 한국전쟁은 일본에 어떠한 이익을 안겨주었는지는 일본의 역사학자 미촌수수다음과 같은 말이 뚜렷이 설명해주고 있다.


[ 만약 일본이 없었다면 미국이 한국에서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으로 일본독점자분은 한국전쟁을 ≪신풍≫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참고)(미촌수수, ≪한국전쟁≫, ≪한국현대사연구≫1, 이성과 현실, 226W족)


한국전쟁에서 일본의 역할은 매우 컸다. 미국비행기는 일본의 비행장을 이룩하여 낫산자동차와 아시아 택카회가가 만든 네이팜탄을 한국에 투하하였다. 미국대포는 막대한 양의 일제포탄을 쏘아댔으며, 미국의 제7함대는 일본항을 출발하여 거의 3년 동안 한국의 해안선을 포격하였다) **(참고) (하버트 P. 빅스, 위의 글, 165쪽) .



요컨대 일본은 전쟁수행에서 없어서는 안될 배우기지였던 셈이다. 한국전쟁동안 일본인의 활약이 단지 배후기지의 차원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퇴역한 일본군 장성은 연합군 동경사령부에서 고문으로 일했으며, 중견간부들은 한국에서 미8군을 도왔다. 또한 일본의 해상자위대는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 약 1,200명에 이르는 구일본제국 해군들이 원산, 군산, 인천 및 진남포의 항구에서 미해군을 도와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 ≪이것은 극비였다.



그러나 한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 수천 명의 일본인 전문가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유엔군이 한국에 잔류하는 것마저도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것이다≫ **(참고)(주일미대사 머피의 회고록에서, 미촌수수, 위의 글, 227쪽).


따라서 ≪일본이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나라로 16개 유엔참전국 외에도 일본을 꼽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일본은 마치 가뭄 속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1950년 일본의 GNP는 전쟁전의 수준을 회복하고 수출입 균형도 1950년 하반기에 전후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섰다. 한국전쟁데 따른 일본의 특수수입은 1950년 1억 달러, 1951년 5억 7천만 달러, 1952년 8억 3천만 달러(일본수출액의 41%), 1953년 8억 1천만 달러에 이르러 일본의 경제구조를 군수산업을 핵으로 하는 중공업으로 바꾸었다.


일본이 경제성장한 대가로 ≪메이드 인 저팬≫이라는 각인이 찍힌 네이팜탄이 우리 민족이 머리 위에 비처럼 쏟아졌던 것이다. 일본의 급속한 재무장과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한 정치적 조치들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1949년 9월 8일 일본정부는 맥아더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재일조선인연맹과 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을 해체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간부들을 추방했다. 비슷한 탄압을 일본 안의 좌익에게도 가했다. 1950년 2월 연합군 사령부는 일본노동운동과 교육기관에서 반공활동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어 3월 3일 일본의 병참기지화 정책을 강력히 반대했던 일본공산당을 불법화하였으며, 6월 1일에는 동경에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비상계엄령이 내렸다. 급기야 6월 6일과 7일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24명과 당기관지 ≪적기≫의 편집위원 17명을 추방하고 1만 2천 명의 노조원과 정부관리들을 정치적 이유로 해직하였다. 마침내 6월 16일 윌로비 육군 소장은 일본 전역에서 공개집회와 시위를 금지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사실상 전시동원체제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9일 뒤인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대만의 장개석은 이 무렵 극도의 위기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1950년 새해 벽두부터 대만공격이 1950년 6월에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5월 국민당은 해난성을 잃음으로써 이제 남은 곳은 대만뿐이었다. 장개석과 국민당의 몰락을 예상하는 정보가 잇따랐다. 로버트 스트롱 타이페이 주재 미영사는 5월 17일 ≪대만의 운명ㅇ느 결정됐다.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이 6월 15일에서 7월 말 사이에 있을 것이다≫ 보고서를 제출했다. 장개석의 몰락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보였다. 이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국민당 군대의 일부가 장개석 축출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을 즈음 한국전쟁이 불쑥 일어났다≫(당시 미국무성 차관보 딘 러스크의 발언,).


한국전쟁의 발판으로 이승만이 몰락하기 바로 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듯이 장개석 역시 몰락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규정을 내릴 수 있다.


한국전쟁은 미국에게는 봉쇄정책을 굳게 다지는 시멘트였고, 일본에게는 군국주의 부활의 토대였으며, 이승만과 장개석에게는 자신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생명의 동아줄이었다. 타오르는 한반도 한반도 주변의 동북아정세가 커다란 변동을 겪는 동안 한반도 내부에서도 점차 긴장이 높아가고 있었다. 남한을 소련봉쇄의 전진기지로 여기고 있던 미국은 대한민국의 수립과 함께 급격한 무력증강을 시도하였다.


흔히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현저한 열세에 처해 있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남한이 9만 5,000명의 군

대와 이와 거의 같은 무장을 한 4만 8,000명의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던 반면에 북

한은 10만 3,800명의 군대와 1만 8,600명의 경찰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 보고가 대한군사 원조를 급격히 늘리기 위해 남한의 군사력을 축소해서 보고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미루어본다면 북한이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미국은 결코 대한민국의 군사력증강에 인색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정부로부터 2차 대전 이후 한국전쟁 초까지 4억 9,570만 달러의 군사, 경제 원조를 받았는데 이중 경제부분의 지원은 고작 5,370만 달러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군사원조였다.


이승만 정권은 1949~1950년 사이에 군사력을 급속히 확장시키고 있었다. 1948년 말 남한군대는 약 6만 명이었으나 전쟁이 발발할 무렵에는 약 10만 명으로 증가했다.**(참고) (로버트 시문조, 위의 글, 125쪽)


1950년 1월 26일에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하여 약 2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원조를 단행하였다.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에 따르면 ≪한국군대를 정비하려는 미군사고문단의 계획에서 유일한 결정은 시간이 없었다는 것≫뿐이었다. 또한 어떤 이들은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지 1년 뒤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여 ≪미군은 왜 철수했는가? 철수한 것은 커다란 실수였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미군은 결코 철수하지 않았다. 당시 미군군사고문단 500여 명이 남아서 모든 남한군부대에 상주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군사고문단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수립한 지 열흘 만에 체결한 ≪과도기간 잠정적 군사 및 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과 조직, 훈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군을 매우 성공적으로 훈련시켰다.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마게렛 히긴스라는 미국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로버츠는 ≪한국군은 미국이 어떻게 5백명의 미전투전문요원을 투입하여 10만 명이나 되는 녀석들을 당신을 위해 총을 쏠 수 있도록 훈련시켰는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다≫라고 말했다. 로버츠는 또한 ≪남한군대는 미국이 투자한 것을 충실히 지키는 주구≫라고 묘사하면서 ≪나의 군대는 무적의 군대≫라고 자랑하였다.


그는 북한의 침략위협에 대해서도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환영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격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고 떠벌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편 이승만은 이러한 군사력 증강과 함께 날마다 소리높여 북진통일을 외쳐댔다. 이승만은 1949년 1얼 12일 기자회견에서 ≪우리들의 계획은 북한인민군을 해산시키고 무장을 해제하는 데 있다≫고 하였으며, 이밖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진통일을 드러내놓고 떠들어댔다. 이승만은 또한 ≪북한공사당을 일망타진할 무기를 우리에게 달라≫고 미국에 호소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무기입수를 위해 이승만 휘하의 고관 두 명이 활약하고 있었다. 존 장(장면) 주미대사와 이승만의 특사 조병옥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승만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남북통일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획을 그들에게 아주 비밀리에 설명할 것, 참으로 이제 모든 점에서 통일을 위한 준비가 다 갖추어졌지만 단 하나 즉 무기와 탄약만이 부족하다는 점을 그들에게 주지시키라.**(참고) (데이비드 콩드, 위의 책 22쪽)

이승만과 장면, 조병옥은 더 많은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군은 북의 갱단에 비해 무방비상태라고, 맨주먹뿐이라고 절규했지만 미국은 이들의 절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을 뿐이다.

북한공산당은 병력에서도 장비에서도 한국군에 비해 열세에 처해 있기 때문에 북한측이 먼저 남한을 공격하는 일은 확실히 있을 수 없다. 미군은 철수할 때 충분할 만큼 많은 무기와 탄약을 남겨놓고 왔다.**(참고) (데이비드 콩드, 위의 책, 34쪽)

흔히 전쟁 전 미국과 이승만 사이의 갈등을 강조하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이 한국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차이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갈등은 매우 사소한 것으로 그것은 ≪주인이 줄을 잡고 있는데도 목걸이에 걸려 거의 질식할 정도로 뛰쳐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냥개≫와 주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비슷한 것이었다. 또한 국방군 관계자들도 이승만의 북벌소동에 장단을 맞추어 북벌을 더욱 요란스럽게 떠들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군의 무장장비는 대단히 좋으며 3일 안에 북한을 평정할 수 있다. 우리 국군은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하루 사이에 평양, 원산까지 점령할 실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1시단장 김석원도 ≪북벌을 개시하면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것이다≫고 떠벌였다.


한편 이러한 북벌소동이 저면전쟁에 대한 불안감을 높이는 동안 38선 일대에서는 남북한 군대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존 메릴에 따르면 ≪38선에서의 충돌은 더 많은 무기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남한에 의해 교묘하게 조작된 것으로 보였다≫ **(참고)(존 메릴, ≪한국의 내란 1948~1950≫, ≪한국전쟁과 한미관계≫, 청사, 172쪽).


한국전쟁 전까지 38선 부근에서 일어난 충돌은 모두 874회였는데 그 대부분은 1949년 5월부터 8월 사이에 주로 웅진반도와 개성 근처에서 이루어졌다. 38선은 이미 실제의 전선이었다.

이러한 충돌에서 남북한 모두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1949년 10월 사단장 회의에서 로버츠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38선 이북지역에 대한 수차례의 공격이 나의 명령에 따라 개시된 것은 사실이며 이후에도 많은 명령이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부대는 막대한 탄약을 소비하면서 북한을 공격했으나 큰 손해를 입은 것 이외에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남한 국방군에게 38선 이북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미국군사고문단뿐이다. 이후로 군사고문단의 명령이 아니면 절대로 공격을 해서는 안된다. **(참고)(데이비드 콩드, 위의 책 49쪽)



   이상..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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