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의 구체적인6.25의 분석..03편

03편.



한편 이 시기에는 38선에서 무장충돌과 함께 '제주도 4․3항쟁'과 '여순무장봉기'에 뒤이은 유격전도 산악지역에서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1949년 9월 한달 동안만 해도 교전회수 1,272회에 군경사살 1,512명, 동원된 인원도 7만 7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

특히 지리산지구에서는 대부대가 진주, 광주 등의 대도시에서 진공작전을 벌일 정도였다. 이러한 유격대는 민중과 한몸이 되어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게는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 비수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하여 1949년 11월부터 미국의 군사원조와 군사고문단의 직접 지휘로 국방군 5개 사단과 수만 명의 경찰, 우익청년단을 동원하여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토벌대는 빨치산과 민중들의 연계를 막기 위해 산간지역 주민 9만여 명을 이주시키는 한편 부락을 강제로 불태워 버렸다. 그런 뒤에 유격대의 거점을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숱한 민중들이 학살당했다. 12월 24일 경상북도에서 세달 동안 산간벽촌에서 저지른 학살의 현장을 살펴보자.

마을 주민들이 그러한 혐의사실을 부인했지만 국방군 병사들은 카빈소총, 수류탄, 바추카포 등을 난사하였다. 

3명의 갓난아기와 9명의 학생 그리고 성인남녀 각 43명 등 모두 98명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죽어갔다. 국방군은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소총으로 확인사살하였다.
※《참고》(존 메릴, ≪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 과학과 사상, 307쪽)

이러한 대규모 토벌작전을 맞은 유격대는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후퇴전술을 쓸 수밖에 없었다. 로버츠는 1949년 11월에서 1950년 3월 사이에 게릴라운동의 근거지를 파괴하고 6,000명의 게릴라들을 소탕했다고 말했지만, 유격대는 숱한 역량이 파괴되었는데도 1950년 3월부터는 다시 진영을 정비하여 공세를 취하게 된다.

한반도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이미 실제의 전장이었다. 소련과 북한 그럼 이 시기 소련과 북한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까지 대부분의 미국과 국내 학자들은 ≪스탈린이 사주하여 김일성이 전쟁을 도발했다≫고 설명해왔다.

하지만 이같은 설명으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만약 스탈린이 사주를 했다면 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갖고 있던 소련대표가 출석하지 않아 미국에게 유엔군이라는 황금깃발을 내어주고 말았을까?

할리데이가 ≪6월 25일 이후 소련의 북한에 대한 군사물자 출하가 증가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감소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고 말한 것처럼 왜 소련은 북한에 충분한 군사물자를 대주지 않아 미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서 북한군이 그토록 커다란 고통을 겪게 했을까? 

만약 소련이 한국전쟁을 부추겼다면 전쟁을 6월에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장마철이어서 전쟁 초기에 우세했던 북한의 공군과 탱크를 제대로 가동할 수 없었으며―여름에 남쪽을 치지 않고 겨울에 북쪽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 전쟁의 상식이다―또한 소련대표가 유엔안보리에 출석하지 않아 유엔에서 소련이 북한을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련이 출석했던 8월에는 미국에 유리한 어떠한 결정도 유엔안보리에서 통과되지 않았다. 당시 소련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소련은 당시 오히려 미국과 직접대결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소련은 미국에 비해 아직 커다란 열세에 놓여 있었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은 대대적인 군사력강화를 추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금씩 좁혀가고 있던 미소간의 군사력 차이는 더욱 크게 벌어질 것이다.
※《참고》≪평화가 유지될 때만 시간은 소련의 편일 수 있었다≫(콜코,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김주환 엮음,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79쪽).

소련의 이러한 입장은 전쟁이 일어난 뒤 보여준 그들의 태도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소련은 7월 4일까지 한국전쟁에 대한 그들의 공식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소련언론은 한국전쟁에 대한 북한의 입장과 함께 ≪로이터통신≫, ≪AP통신≫의 보도들을 함께 실음으로써 객관적 입장을 지키고자 했다.

이것은 중국이 6월 27일 당기관지 ≪인민일보≫에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을 격렬히 비난한 것에 비추어볼 때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소련은 또한 전쟁이 일어난 바로 뒤 한반도 근해에 있던 그들의 함대를 모두 철수했고 그 뒤에도 미국의 해상운송을 단 한 차례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군 안에 있던 군사고문단을 본국으로 소환함으로써―당시 북한군 안에는 40여 명의 소련군사고문단이 있었다―전쟁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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