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의 구체적인 6.25의 분석..05편

05편.




한편 1950년 6월 17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덜레스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6월 21일까지 머물렀다. 1950년 4월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미국무장관의 공화당 고문으로 임명된 덜레스는 극우파로 당시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훗날 베트남전쟁의 주모자로 세계의 비난을 받는 덜레스의 등장은 미국의 적극적인 아시아정책―일본을 병참기지로 하고 남한, 대만, 베트남을 전진기지로 하는―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을 겨우 일주일 앞두고 이루어진 덜레스의 방한은 매우 의미깊은 것이었다. 6월 18일 덜레스는 신성모의 안내로 38선으로 향했다. 그는 38선 위에서 한국군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어떠한 적, 그것이 비록 최강의 적일지라도 여러분에게 대항할 수는 없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큰 힘을 사용할 시간은 그리 멀지 않았다.**(참고)(데이비드 콩드, 위의 책, 90쪽) 덜레스는 6월 19일에는 국회의 개원식에 참석하여 미리 국무성의 검토를 받은 연설문을 낭독했다. 덜레스의 연설은 미국의 극동정책을 설명하고 북한을 비난하는 것과 아울러 다음과 같은 뜻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단 한순간이라도 우리는 소련공산주의자들이 영원히 그들의 노예들을 잡아가두려는 것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계속 인간의 자유수호라는 위대한 사명에 책임을 다한다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참고)(콜코, 위의 글, 67쪽)


덜레스는 몇 주일 뒤 자신이 한국 국회에서 연설한 목적은 이승만에게 한국이 침략을 받으면 미국은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무엇인가≫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을 뜻하지는 밝히지 않았다. 덜레스의 방문은 이승만을 격려하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통일을 이루겠다는 그의 의지에 힘을 불어넣었다. 이승만은 덜레스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대단히 만족해하면서 ≪우리들이 실수로 냉전에서 진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열전에서 우리의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참고)(콜코, 위의 글, 67쪽)고 말하였다. 열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한국방문을 마친 덜레스는 곧바로 동경으로 가서 6월 21일, 당시 극동지역을 순방하고 있던 존슨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과 회담을 갖고 이어서 맥아더와 다시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는 6월 22일 기자들 앞에서 ≪적극적인 행동이 개시될 것이다≫라고 천명하였다. 이 자리에서 덜레스는 적극적인 행동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스톤은 덜레스가 말한 적극적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때는 6월 22일이었다. 그 뒤 미국이 취한 유일하게 적극적인 행동은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과 태평양지역의 공산주의에 대해서 대규모로 간섭한다는 6월 27일 트루만 선언이었다. 덜레스가 ≪국제적인 평화와 안전, 세계의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 행동≫을 예언했을 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참고)(이프 크톤, ≪비사 한국전쟁≫, 신학문사, 27쪽, 데이비드 콩드, 위의 책, 94쪽에서 재인용) 승리를 위한 후퇴 북한군은 전쟁이 일어난 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이것은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가 남한군대를 아시아 최고의 군대라고 격찬했던 것이나, 남한군대는 북한군대를 충분히 쳐부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 전쟁 전의 각종 보고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더구나 맥아더사령부가 7월 30일 보고한 것처럼 ≪북한의 공격이 13개 내지 14개 사단의 동원을 필요로 하는데도 6월 26일에는 단지 6개 사단만을 동원했던 점≫과 당시는 장마철이어서 북한은 남한에 비해 우세한 공군력과 기갑부대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며, 그런데도 탱크의 4분의 1만을 전선에 배치했던 점, 그리고 당시 남한군이 다가올 전쟁을 예상하여 거의 대부분의 병력과 보급품을 38선에서 서울에 이르는 지역에 집중배치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북한군의 서울점령은 정말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북한군이 군대의 숫자나 장비 면에서 우수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도덕적 우월함과 남한 민중들의 지지성원에 힘입은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만약 이승만의 군대가 공공연히 북한으로 진격하였다고 하면 확실히 미국은 덜레스가 말한 것처럼 전쟁에 개입할 명분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북한군이 먼저 도발했을 경우에는 반공을 선전하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게 침략자라는 낙인을 찍기에는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외국의 개입이 정당화되려면 이승만군대가 패배하느 사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필요했으며, 더욱이 이러한 허위적인 현상은 빠른 시일 안에 조직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탈주, 도주하는 병사가 점점 많아진 이승만군대가 공격계획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패주하게 되었을 때 미국의 간섭은 확실해졌다. 26일까지 전쟁의 분위기는 매우 낙관적이었다. 춘천, 원주 지구의 6사단과 동해안의 8사단은 초기에 모두 효과있게 대처했으며 맥아더도 26일까지는 남한이 방어를 잘 해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26일 발표된 국회의 성명도 당시의 상황을 심각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같은 날 주한미군사고문단의 보고에 따르면 초기의 전투상황은 낙관적이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대기하고 있던 12대의 미군수송기는 다른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배치될 정도였다.


만약 이승만군대가 이와 같은 성공적인 방어를 계속했다면 25일의 군사적 충돌은 결국 이전에 38선에서 수백회에 걸쳐 일어났던 충돌사태와 마찬가지로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시아에서 그렇게도 원하던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절한 위기―전세계를 무장시키고, 자유세계를 수호하려는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며, 미국경제의 불경기를 해소해줄 적절한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27일부터 낙관적이던 상황은 갑자기 비관적으로 바뀌었다. 맥아더는 27일 오전 ≪남한의 완전한 붕괴가 임박했다≫는 전보를 쳤으며, 그날 이승만정부는 서울을 포기했다. 28일 새벽 2시 남한군은 한강인도교를 폭파시켰다. 그러나 한강인도교가 폭파되는 순간에도 한국군의 주력은 여전히 한강 이북에 머물러 있었고, 대부분의 중화기나 장비, 보급품도 역시 호송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한강교의 폭파는 6~8시간 정도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후퇴하지 못한 3개 사단의 병력과 군사장비는 충분히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결국 한국군의 병력과 군사장비의 결정적 약화를 초래하고만 한강교의 성급한 폭파는 통상적인 군사상식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참고) (박세길, ≪다시쓰는 한국현대사≫1, 돌배개, 198쪽)


또한 당시 남한군대의 후퇴상황은 그다지 비참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남한군대는 흔히 트럭을 타고 탄약을 갖춘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양호한 신체적 조건하에서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노래까지 불러가면서 남으로 후퇴했다는 것이다. 참패하여 패주하는 군대―소위 완전히 항복할 정도로 참패하여 패주하는 군대―는 위와 같은 식으로 후퇴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미국과 한국의 수뇌부는 한국군의 후퇴가 계획된 것임을 내비치는 발언을 얼떨결에 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에 있던 덜레스는 전쟁이 일어난 지 8시간만에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남한은 공격을 격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제하고 있다. 그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남한이 정당한 이유없이 무력공격으로 유린되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는다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세계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는 제 106조에 따라 유엔을 대표하는 5개국의 행동을 요청할 수도 있으며, 또한 5개국이 그러한 반응을 기꺼이 나타내도록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시사하고 싶다.


[ 이 전보에 대해 트루만은 그의 회고록에 ≪그(덜레스)도 역시 우리들이 취해야 할 행동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썼다. 맥아더도 7월 하반기 자신의 보고서에서 ≪군의 작전은 기본적으로 계획된 철수이며 시간을 벌기 위해 행동을 지연시키는 것이다≫고 썼으며 이승만 역시 ≪여러가지 전술적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도시에서 도시로 계속 후퇴해 왔습니다. 우리는 남한지역의 너무 광대한 지역을 잃기 전에 미국의 증원군이 조석히 도착해서 반격을 개시하리라는 기대에서 그러한 전술들을 구사했습니다≫라고 썼다. ] 



콜코에 따르면 이러한 후퇴는 성공을 위한 후퇴, 곧 미군개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후퇴였다. 그리하여 남한 군대의 후퇴는 북한군의 진격속도를 훨씬 앞질렀다. 미국의 신속한 대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미국의 대응은 상당히 신속하고 짜임새 있었다. 마치 그것은 미리 준비되고 계획된 각본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연극의 한 장면과도 같았으며 또한 계획의 성공을 위한 조건은 기묘하리만치 매순간 맞아떨어져 갔다.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주한미대사 무초의 최초보고는 미국시간으로 6월 24일 토요일 오후 9시 26분 미국무성에 도착했다. 이때 트루만은 고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무장관 애치슨이 신속하게 지휘하여 북한을 침략자로 유엔에 제소하고 미군이 유엔의 옷을 입고 한반도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애치슨이 무슨 권한으로 이렇듯 어려운 문제를 그토록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는지는 커다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25일 오후 2시(한국시간 26일 오전 3시) 애치슨의 요구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소집되었다. 소련이 불참한 이 회의에서 미국대표는 무초대사의 보고를 근거로 하여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한,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준비해 둔 결의초안을 제출했으며, 유엔은 이를 통과시켰다. 한편 휴가에서 돌아온 트루만은 26일과 27일 잇따라 백악관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다음의 사항들이 결정되었다.


1. 맥아더 휘하의 해, 공군을 즉각 한국에 투입시킬 것.

2. 미국은 유엔의 깃발 아래 참전해야 한다.

3. 조만간 있게 될 지상군을 포함한 대규모부대를 투입하기 위해 각군 참모총장은 군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명령을 준비할 것.

4. 미7함대를 대만과 중국 사이의 해협에 파견하고 필리핀의 미군을 증강시킬 것이며 이와 함께 필리핀 정부에 대한 원조를 강화할 것. 이어서 26일 밤 10시 맥아더에게 ≪즉시 한국에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는 유엔이 한반도에서의 군사작전을 승인한 20시간 전의 일이었다. 다음날 오전 트루만은 맥아더에게 출동을 명령하였다고 발표하면서 ≪공산주의는 독립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파괴활동을 넘어서 이제는 무력침략과 전쟁에까지 호소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미국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 어떤 나라의 내전에도 개입할 것≫임을 드러내놓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은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향해 투쟁하는 나라들을 불법으로 간섭하겠다는 제국주의의 권리선언이었다.


같은 날 유엔안보리는 다시 ≪북한의 무장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에서 국제 평화와 안전을 되살리는 데 필요한 원조와 빠른 군사조치를 취할 것≫을 승인하였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미국은 유엔의 승인도 받기 전에 이미 한국전쟁에 개입했으며 ≪미국은 명목상으로는 유엔의 명령으로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실제로는 유엔이 미국의 강압으로 전쟁에 뛰어들도록 유엔가맹국에 요청한 것이다≫ **(참고) (≪미네아폴리스 트리뷴≫, 1950. 7. 23)


미군의 개입에 대한 유엔의 사후승인은 남한군대가 형편없이 패배만을 거듭하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어서 6월 29일 트루만은 맥아더에게 38선 이북까지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다음날에는 육군을 포함하여 미극동군의 모든 병력을 한국에서 사용할 권한까지 주었다. 마침내 7월 7일 유엔안보리는 유엔군 통합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을 미국이 임명한다는 세 번째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렇게 하여 ≪유엔군≫이 태어났다. 그러나 유엔군이란 미군이 가면을 쓴 모습일 뿐이었다. 실제 공군의 98% 이상, 해군의 83.3%, 지상군의 88%가 미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국이 유엔의 깃발을 손에 들고 참전한 것은 한국전쟁이 남북한의 대결로 그치는한 그것은 민족 내부의 문제에 해당하므로 다른 민족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었고, 따라서 미국은 유엔이라는 간판을 내세움으로써 이러한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리가 양의 탈을 쓴다고 이리가 아닐 수 없듯이 미군이 비록 유엔의 옷을 갈아입엇다고 해서 몸뚱이 마저 바뀔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맥아더 조차도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유엔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이름뿐이었다... 나의 사령부에 대한 완전한 통제와 내가 한 모든 일은 참모회의의 결정에서 이루어졌고 나의 연락망도 육군참모총장이 규제하였다... 나는 유엔과 조금도 직접적 관련을 갖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유엔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미국의 행동은 신속정확, 주도면밀, 바로 그것이엇다. 마치 예정된 계획을 수행하기나 하는 것처럼.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하나의 가설 이제 한국전쟁의 기원에 얽힌 복잡한 수수께끼를 풀 차례가 되었다. 수수께끼를 풀기에 앞서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다음에 제시되는 것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28가지에 이른다는 개전원인론에 하나를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이 진실에 가장 접근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내용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도리 수 있을 것이다.


1. 1949년 소련의 원폭실험 성공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동북아시아 정세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왓다. 미국은 중국을 발판으로 소련을 봉쇄하려던 자신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때까지 무장해제시키고 있던 일본을 다시 무장시켜 후방병참기지로 만들고 남한, 대만, 베트남을 대륙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는다는 정책을 세우게 되었다.


2. 1949년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은 전세계에서 소련을 봉쇄한다는 미국의 전략에 큰 손상을 입혔다. 미국은 흐트러진 봉쇄정책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절한 규모의 제한전쟁이 필요햇다. 이것은 미국이 자유세계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에 대해 강력히 대처한다는 것을 전세계인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미국 내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더욱 필요했다.



     이상..   다음편에서~~

덧글

  • 엑셀리온 2021/07/31 19:37 # 답글

    덜레스의 발언은 그냥 미국 정치인들이 흔히 하는 발언이고, 크게 보면 그냥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인데, 그마저도 그냥 형식적인 선언을 가지고 과대 해석을 하는군요.

    맥아더의 발언 역시 군인으로서 닳고 닳은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에 입각한 발언일 뿐.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음모론은 좀 자제해주시고,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들 파벌이나 세력과 관련하여 어떤 정치적 입장과 상대방에 대한 혐오, 비꼼 등등의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파악하세요.

    님 방식으로 하면 임진왜란은 국내 유학자들이 상대방 당파를 공격하기 위해 왜군을 끌어들인 전쟁이 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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