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편.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에 끝난 한반도 전쟁은 3백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국토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일단 원인과 이유를 떠나서 유엔의 깃발 하에 이 나라를 짓밟은 소위 ”서구문명”의 선봉장 미국은 한반도에 나름대로 의도적으로 대규모 폭격 테러를자행했다.
심지어 미국은 전쟁 과정에서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핵공격을 감행할 계획까지 세운 바 있다. 그러나 미군에 의해 자행된 이 끔찍한학살행위는 폭로되지 않은 채, 한반도 전쟁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좋은 재료가 되고 있을 뿐이다.
*** 이제 이 전쟁의 성격과 진실을 다시 한번 논쟁의 도마 위에 올릴 필요가 있다.
지배층들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반격을 가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전쟁은 미국의 냉전 전략이 실행에 옮겨진
첫 번째 주요한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운동이 분출하였다. 이탈리아, 그리스, 독일 등에서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참혹한 결과로 인해 기존 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와 근로 국민이 투쟁으로 일어선 것이었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패배로 지배질서가 붕괴했다. 이제 노동자와 농민이 각지에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일에 돌입했다.
그리고 여타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치열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 필리핀, 인도,아프리카, 남미 등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가열된게
현실이었다.
이러한 폭발적 세계정세는 세력확대를 노리고 있던 소련의 스탈린 일당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세력을 국제적으로 확대하여 자신들의 특권, 정치권력 등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후 미국은 전후 원하든 원치않든 전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미국이 당면한 과제는 당연히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미 동구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1948년 혁명으로 중국대륙에서도 모택동을 위시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대처하여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을 ”억제하고후퇴시킬” 냉전 전략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실제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전세계에서 터져나오는 사회혁명과 민족해방투쟁을 압살하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 자유주의자들과 자칭 좌익 정치세력들은 세계 곳곳에 유엔이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라크, 소말리아,보스니아 등지에 대한 유엔의 개입을 인류문명을 위기에서 구하는 고귀한 노력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의 첫 번째 대규모 군사적 개입 행위였던 6·25전쟁의 진짜 목적이 한반도에서끓어오르던 사회혁명을 압살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한반도 전쟁은 1950년대 초 각국에 산재해
있던 소위 맑스주의 정치조직들의 성격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모택동의 군대가 장개석 세력을 대만으로 쫓아버리고 중국대륙에 사회혁명을 달성한 후 바로 뒤이어 이 전쟁이 발발했다. 따라서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어 그리고 김일성도 그 영향을 받고 전세계에진군하는 공산주의 물결이 한반도를 뒤덮는 계기가 바로 한반도 전쟁이라고 많은 좌익조직들은 바라보았다.
한반도 전쟁의 기원을 연구한 대다수의 저술들은누가 38선을 먼저 침해했느냐? 하는 재미없는 주제를 논의의 초점으로 잡고 있다. 대개의 서방역사가들과 남북한 관변학자들은 이 주제를 가지고 지금껏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시안적 분석틀은 1945년 종전과함께 전세계에 밀어닥친 그리고 한반도 전역을 뒤흔든 대대적인 사회혁명의 기운을 무시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진행된 한반도의 이른바 계급투쟁은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바로 이러한 전체적 상황이야말로 뒤이어 일어난 한반도 전쟁과분단을 올바로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에 대항하여, 미국이 주도한냉전전략이 한반도 전쟁의 성격을 규정했다.
유엔의 깃발 아래 모인 이른바 미국과 그 우방들 세력과 소련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은 중국이 개입하면서 이 전쟁은 공산주의 세력과 자본주의 세력의 시험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은1945년 일본의 패망에 뒤이어 조성된 혁명적 격동에 의해서 갑자기 조성되었다.
일본 식민지 통치 시기에 한반도에는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가 ”불균등 결합 발전(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이라고 개념화한 현상이 철저하게 전개되었다.
즉 봉건적 토지소유가 현존하는 가운데 제국주의공업화가 일본의 전쟁 목적을 위해 이식되었다. 이결과 이 나라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식민지 통치를 담당한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 사업을 시행하여 양반이나 농민의 토지를 등록시켰다.
등록되지 않은 토지는 조선총독부의 재산이 되었다. 이 정책의 목적은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우리 국민으로부터 강탈하는 데에있었다.
식민지 지배에 응하여 협력한 지배층은 토지를 계속 보유할 수 있었으나 많은 국민들은 일본군에 끌려가거나 일본으로 이송되어 강제노역을 강요당했다.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인 기업은 130만명의 우리동포를 고용하였으며 기타 수십만의 동포들이 일본이나 만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상.. 다음편에서~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에 끝난 한반도 전쟁은 3백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국토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일단 원인과 이유를 떠나서 유엔의 깃발 하에 이 나라를 짓밟은 소위 ”서구문명”의 선봉장 미국은 한반도에 나름대로 의도적으로 대규모 폭격 테러를자행했다.
심지어 미국은 전쟁 과정에서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핵공격을 감행할 계획까지 세운 바 있다. 그러나 미군에 의해 자행된 이 끔찍한학살행위는 폭로되지 않은 채, 한반도 전쟁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좋은 재료가 되고 있을 뿐이다.
*** 이제 이 전쟁의 성격과 진실을 다시 한번 논쟁의 도마 위에 올릴 필요가 있다.
지배층들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반격을 가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전쟁은 미국의 냉전 전략이 실행에 옮겨진
첫 번째 주요한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운동이 분출하였다. 이탈리아, 그리스, 독일 등에서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참혹한 결과로 인해 기존 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와 근로 국민이 투쟁으로 일어선 것이었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패배로 지배질서가 붕괴했다. 이제 노동자와 농민이 각지에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일에 돌입했다.
그리고 여타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치열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 필리핀, 인도,아프리카, 남미 등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가열된게
현실이었다.
이러한 폭발적 세계정세는 세력확대를 노리고 있던 소련의 스탈린 일당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세력을 국제적으로 확대하여 자신들의 특권, 정치권력 등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후 미국은 전후 원하든 원치않든 전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미국이 당면한 과제는 당연히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미 동구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1948년 혁명으로 중국대륙에서도 모택동을 위시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대처하여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을 ”억제하고후퇴시킬” 냉전 전략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실제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전세계에서 터져나오는 사회혁명과 민족해방투쟁을 압살하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 자유주의자들과 자칭 좌익 정치세력들은 세계 곳곳에 유엔이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라크, 소말리아,보스니아 등지에 대한 유엔의 개입을 인류문명을 위기에서 구하는 고귀한 노력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의 첫 번째 대규모 군사적 개입 행위였던 6·25전쟁의 진짜 목적이 한반도에서끓어오르던 사회혁명을 압살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한반도 전쟁은 1950년대 초 각국에 산재해
있던 소위 맑스주의 정치조직들의 성격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모택동의 군대가 장개석 세력을 대만으로 쫓아버리고 중국대륙에 사회혁명을 달성한 후 바로 뒤이어 이 전쟁이 발발했다. 따라서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어 그리고 김일성도 그 영향을 받고 전세계에진군하는 공산주의 물결이 한반도를 뒤덮는 계기가 바로 한반도 전쟁이라고 많은 좌익조직들은 바라보았다.
한반도 전쟁의 기원을 연구한 대다수의 저술들은누가 38선을 먼저 침해했느냐? 하는 재미없는 주제를 논의의 초점으로 잡고 있다. 대개의 서방역사가들과 남북한 관변학자들은 이 주제를 가지고 지금껏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시안적 분석틀은 1945년 종전과함께 전세계에 밀어닥친 그리고 한반도 전역을 뒤흔든 대대적인 사회혁명의 기운을 무시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진행된 한반도의 이른바 계급투쟁은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바로 이러한 전체적 상황이야말로 뒤이어 일어난 한반도 전쟁과분단을 올바로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에 대항하여, 미국이 주도한냉전전략이 한반도 전쟁의 성격을 규정했다.
유엔의 깃발 아래 모인 이른바 미국과 그 우방들 세력과 소련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은 중국이 개입하면서 이 전쟁은 공산주의 세력과 자본주의 세력의 시험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은1945년 일본의 패망에 뒤이어 조성된 혁명적 격동에 의해서 갑자기 조성되었다.
일본 식민지 통치 시기에 한반도에는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가 ”불균등 결합 발전(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이라고 개념화한 현상이 철저하게 전개되었다.
즉 봉건적 토지소유가 현존하는 가운데 제국주의공업화가 일본의 전쟁 목적을 위해 이식되었다. 이결과 이 나라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식민지 통치를 담당한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 사업을 시행하여 양반이나 농민의 토지를 등록시켰다.
등록되지 않은 토지는 조선총독부의 재산이 되었다. 이 정책의 목적은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우리 국민으로부터 강탈하는 데에있었다.
식민지 지배에 응하여 협력한 지배층은 토지를 계속 보유할 수 있었으나 많은 국민들은 일본군에 끌려가거나 일본으로 이송되어 강제노역을 강요당했다.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인 기업은 130만명의 우리동포를 고용하였으며 기타 수십만의 동포들이 일본이나 만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상..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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