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다른시각..02편

02편.


일제 치하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장악한 조선공산당은 파업이나 빨찌산 투쟁을 조직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조선총독부는 일제의 압제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을 ”공산주의 세력의 전복활동”이라고 선전하면서 역으로 공산당의 대중적 신망을 더 올려주었다. 

농민들은 터무니없이 높은 소작료가 철폐되기를 열망하였으며 일제와 친일파 세력을 저주하였다. 

​자본주의 공업화, 지주제도, 식민지통치는 얼키고설키면서 이 땅의 국민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사회혁명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친일세력이었던 지배층은 국민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일본의 식민지 공업화로 노동계급이 성장해 있었다. 

대중의 상당수는 공업 프롤레타리아로 변모했다. 그러나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양반들은 아직 자본가 계급으로 전화하지 못했다.

​1945년 8월 9일 조선총독부는 정권을 여운형에게 넘겼다. 그는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로서 당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를 이미 조직하고 있었다. 

​이제 상황은 마치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과 유사하였다. 건준은 당시 자생적으로 전국에서 생겨난 노동자-농민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전국노동자평의회(전평) 의 깃발 아래 노동자들은 전국에서 공장을 장악했다. 

전평은 공산당이 주도하고 있었으나 사회민주주의 경향도 그 내부에 존재하였다. 미군정 노동문제 고문관 스튜어트 미첨(Stuart Meecham)에 의하면 ”대공장의 거의 전부”는 노동조합이 장악하고 있었다. 전국농민노동조합평의회(전농) 은 지주계급의 토지를 몰수할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당시 투쟁의 수준은 이탈리아나 그리스에서 전개되었던 투쟁들과 유사하였다.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그 우방 연합세력은 바로 이러한 폭발적 혁명 상황에 대면하였다. 얄타회담에서 이들은 조선이 10년에서 30년에 걸쳐 공동신탁통치를받아야 한다고 결정한 바 있었다.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후 한반도에 군대를 진주시키자 미국은 소련군이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지말 것을 주장했다. 

사실 38선은 당시 미국 전쟁성의 하급 관료였던 딘 러스크(Dean Rusk)가 미군 점령지역에 서울이 포함되도록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선에 불과했다. 

​사실 스탈린은 전시에 미국과 맺었던 동맹관계를 훼손시킬 생각이 없었고, 한반도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별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미국의 제안에 즉시 찬성하였으며 소련군은 곧 38선 북쪽으로 물러났다.


이상....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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