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다른 시각..04편

04편





이러한 국제정세의 양극화 현상은 한국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미국

과 소련의 공동신탁통치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강대국 사이의 회

담이 1946년 봄 그리고 1947년 가을에 진행되었으나 모두 결렬되었다. 

이후 연속된 회담에서 소련은 양국의 군대가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수하자고 제안

했다. 1946년의 대중 봉기를 겨우 진압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남한

의 정세에 우려를 나타낸 미국은 일방적으로 회담 불참을 선언하였다. 


미국의 전략은, 한국문제를 자신이 주도하고 있던 유엔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유

엔 한국 임시위원회가 성립되어 한국이 서방의 입맛에 맞는 ”민주주의 체제”로 이

할 때까지 남한을 통치하게 되었다.


 

**  제주도 4·3 봉기


한국임시위원회의 통치는 남한 대중의 저항을 새로 불러 일으켰다. 남노당은 1948

년 2월 7일에 3일간의 총파업을 개시했다. 

곧이어 4월 한국임시위원회는 남한에서 단독으로 선거를 치른다고 발표했다. 이

에 반대하는 봉기가 제주도에서 일어나 일부 우익 인사들과 군인들이 살해되었

다. 

이에 미군정은 피의 억압을 감행했다. 미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 미군정은 도

민의 10 내지 20%에 해당하는 3만에서~6만의 민간인을 처참하게 학살했다.

 

수만 명의 도민들은 일본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악지대로 이동한 게릴

라들은 보급품도 공급받지 못한 채 수개월 동안 정규군과 싸웠으나 결국 진압되었

다. 피비린내 나는 초토화 작전이 끝난 후 선거가 실시되었다.


남한 단독 선거는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우익 세력 그리고 정권을 제외한 모든 계

급 계층의 저항을 받았다.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인 민족주의자 김구 역시 남

한 단독선거가 국토의 분단을 가져올 것이라며 비난했다. 

심지어 김구는 해주와 평양에서 북한 대표들과 회담을 가졌다. 결국반대 진영

은 선거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임시위원회는 선거를 통해 ”남한 유권자들의 자

유 의사가 온전하게 표현되었다”고 선언했다.

선거의 결과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

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유엔 총회는 곧 이 정권을 한국의 유일한 정부라고 인

정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북한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결국 국

토 분단은 공식화되었다.

1948년 후반 남한에는 봉기들이 또 일어났다. 여수와 순천의 군인들이 제주도 게

릴라 잔당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의 지원으로 겨우 위기에서 빠져 나온 이승만 정권에게 또 다른 위기가 닥

친 것이었다. 여수에는 인민위원회가 다시 수립되었다. 제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

로 반군들은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1949년 미 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이승만은 경찰국가를 강화하는 일

로 바빴다.


심지어 부정으로 얼룩진 1948년 국회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을 스파이로 몰아 체

포하였다. 그리고 그의 또는 측근들은 라이벌 김구를 암살하도록 명령을 내린것

같다.(하나의 학설)

이제 해가 지나감에 따라 남북간의 전쟁 가능성이 점점 커졌다. 이승만은 친북 공

산주의 게릴라들을 진압하지 못했다. 

한편 게릴라들은 북한 김일성 정권의 도움이 필요했다. 일 년 내내 국경선인 38선

에서 자주 전투가 빈발했다.

김일성은 남한을 침공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달라고 비밀리에 스탈린과 모택동에

게 간청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결국 동의하였다. 남한 내에 공산당

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대단하여 북한이 침공할 경우 금방 남한을 무너뜨릴 수 있

다고 김일성과 남노당 지도자 박헌영이 이들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스탈린은 김일성의 침공이 미군과 그 세력들은 세력들을 골탕먹일 값싼 방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스탈린) 무엇보다도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비밀

리에 북한의 인민군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모택동은 대만으로 도망친 장개석의 국민당 잔당을 박멸하기 위해 대만 침공에 주

된 관심을 쏟고 있었지만 어쨌든 김일성의 계획에 축복을 보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들은 소련, 중국,북한의 공식 역사 기술에서는 부인되고 있

다.


북한이 가만히 있는데 이승만 정권이 도발을 자행하다가 결국 38선을 넘

어 북한을 침략을 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공개된 소련의 비밀문서들은 김일성이 남침을 계획했으며 스탈린과 모택동

은 이 모든 사항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있다.(곤차로프 이하 공저, [불

안한 동맹자들: 스탈린, 모택동, 한국전쟁,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을 참고하시오)

사실 이승만도 확실히 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주 북침통일을 선언

한 바 있었다.

1949년 10월 그는 3일만에 평양을 점령할 수있다고 큰소리쳤다. 미 소 양군의 철

수 후 이승만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남한에 남아있던 미국 군사고문단의 우두머

리 라버츠 장군은 이렇게 주장했다:


 “전투로 단련된 500여명의 미군 병사와 장교들이 치밀하고도 지혜롭게 미군 대

신 전투를 수행할 10만 군대를 양성하는 방식을 미국 군사고문단이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라버츠 장군의 자신감은 허황된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첫 몇주 동

안 북한의 인민군은 전력이 우세한 것으로 생각된 남한의 국방군을 쉽게 물리치

고 승승장구 남쪽으로 진군했다. 징집된 노동자 농민의 아들들이 이승만의 자본주

의 정권이나 그의 제국주의 후원 세력들을 위해 ”총을 쏠 ” 생각을 전혀 하고 있

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민군의 진격 앞에 국방군은 급속히 전의를 상실하

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인민군의 총칼을 앞세우면서 북한의 기형화된 사회혁명

의 성과들이 전진했다. 3개월 동안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한 인민군은 토지를 재분

배하고 이승만 정권과 그 하수인들, 일본 기업과 기타 독점기업들의 재산을 몰수

다. 


남한의 인민대중은 ”침략자” 인민군을 반기는 듯 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

에 미국의 딘 장군은 그의 저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보기에 인민군에 대한 남한 인민의 태도는 열렬한 환영과 수동적인 인정

의 중간인 것 같았다.” — (윌리엄 딘, [딘 장군의 이야기, General Dean's Story,

1954]) }


미국 정부는 김일성의 적화통일을 보고만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50

년 초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한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경우 미

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 발언은 김일성을 기쁘게 했고 이승

만의 화를 끝까지 돋구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아시아의 신 식민

지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단행했다.



1950년 4월 12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국무성에서 작성한 대외비 메모

를 전달받았다. 이 메모는 전세계적으로 사회혁명의 확산을 막는 정책

(containment)에서 이것을 저지하고 전복 시키는 정책(rollback)으로 전환할 것

을 주장하였다. 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킴으로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자

는 매파가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이들은 맥아더, 덜러스를 비롯한 극동 담당 군

사 및 민간 고위 관리들의 명확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인민군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접한 지 몇 시간 만에 트루먼은 이 전쟁에 개입하기

로 결정했다. 한국임시위원회는 6월 29일 성명을 통해 북한의 남침에 의해 전쟁

이 발발했다고 규정하고 유엔의 개입을 촉구했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동의안이 즉시 통과되었다. 이때 소련은 중국의 회원

국 가입을 거부한 유엔의 결정에 항의하여 불참했다. 유엔군은 미국, 영국, 캐나

다, 호주, 남아공 등 16개국에서 보낸 군대로 구성되었다.과대망상증 환자 맥아더

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전쟁이 9월로 접어들자 전선은 낙동강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승만의 군대

가 곧 패배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연합군은 바다와 하늘을 장악하고 있었

다. 9월 15일 맥아더는 인천항에서 대대적인 수륙양용작전을 구사했다. 이 작전

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로부터 2주가 채 되지 않아 원정군은 인민군을 38

선 북쪽으로 쫓아내었다. 


애초에 유엔은 국경선의 신성함을 수호하겠다고 선언했

으나 이제 유엔군은 38선의 신성함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맥아더와 트

루먼은 공산주의 세력을 밀어부칠 절호의 기회가 바로 이때라고 생각했다. 따라

서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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