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이후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03

03편






***  중국관내에서의 독립운동..



**  의열단



義烈團(의열단)은 1919년 11월에 길림성에서 창단된 뒤 상해로 이동하여 1925년


상반기까지 파괴·암살 등의 의열투쟁에 힘을 쏟았다. 의열단은 20년대 초에 무정


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의열투쟁을 벌였으나 그것만으로 일제를 축출할 수 없다


판단하고 1925년부터 활동방향을 바꾸었다. 의열단의 대표인 金元鳳(김원봉)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


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


達(등연달)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그해 겨울에 광주에서 의열단의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吳成倫(오성륜)·金山(김산)·柳子明(류자명)


등이 함께 참석한 이 회의에서 의열단은 장차 ‘혁명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


다. 이 결정을 바탕으로 의열단은 1927년 초에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것은 광동에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상해와 武昌(무창) 및 南昌(남창)에 지방집행위원회를 두


는 내용이었다.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의열단은 다음해인 1927년 5월에<獨立黨促成運


動(독립당촉성운동)에 대한 宣言(선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이미 1926년 10월


에 결성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이어 1927년 4월에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


당촉성회가 조직된 직후였다.



이로써 의열단은 ‘민족협동전선운동’과 ‘혁명정당’ 결성이라는 두 가지 활동방향


을 정립했다. 그들은 우선 주요 활동지역에서 유일당촉성회를 조직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교 무렵부터 김원봉과 김성숙 등이 활동하고 있던 광동에서 김성


숙이 주도하여 1927년 5월 8일에 광동촉성회를 조직했다. 또한 당시 무한에도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전개한 ‘反革命淸黨運


動’(반혁명청당운동) (상해쿠데타)을 피해 모여든 의열단원들이 많았는데, 박건웅


을 중심으로 무한촉성회가 조직되었다.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安光泉(안광천)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


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


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


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


월 4일에 발표한<朝鮮義烈團(조선의열단) 제3차 全國代表大會宣言(전국대표대회


선언)>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


었다. 이는 결국 의열단이 1926년 겨울에 결의한 ‘혁명정당 전환’ 방침을 사실화


하면서, 이와 함께 1927년에 표명한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위해 힘을 기


울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이 나온 바로 다음 달인 11월에 의열단은<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라는 발표문을 통해 협동전선의 실천적 형태로 ‘통일적 정


당’을 제안하였다.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安光泉(안광천)과 제휴했다. 그


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


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 그러다가 1930년에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


될 무렵,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1929년 봄 이래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러다가 1931년 9월에 일제의 만주침공을 접하면서 의열단의 중심세력


은 남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의열단 활동은 김원봉이 남경에서 군사


간부를 양성한 일과 한일래와 박건웅이 중심이 되어 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한국대


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여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한 일로 나타났다.




김원봉은 남경에서 황포군관학교를 통해 맺어진 인연을 최대한 살려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에<中韓合作*중한합작)에 관한 建議(건의)>,<韓國革命(한국혁명)의


現狀(현상)과 本團(본단)의 策略(책략)>,<朝鮮義烈團(조선의열단)의 政治決意案


(정치결의안)> 등을 제출하고, 그 결과 장개석의 결재를 얻어 조선혁명군사정치


간부학교를 열었다. 이 학교의 설립목적은 청년간부들에게 항일투쟁 정신을 계승


시키고 근대적 군사교육을 시켜 한국의 절대독립을 달성하고 중국의 목표인 만주


국 탈환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기까지 3기에 걸쳐 모두 125명의 청년간부들을 배출했다.



의열단이 전개한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1920년대 후반기에


추진되다가 일단 실패한 민족협동전선체 구성에 관한 노력이었다. 1932년 10월


이래로 구체화된 이 활동은 의열단을 비롯하여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광복


동지회·신한독립당 등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各團體聯合籌備委員會(각단체연합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뒤이어 11월 10일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이로써 1926년 이후 상해 등 중국본토지역에서 추진된 민족협동전선


운동이 한 단계 나아가 장차 ‘대동단결체’를 조직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의


열단의 위치에서 볼 , 이러한 결실은 1926년 겨울에 광주에서 열린 의열단 개조


를 위한 전체회의와 1927년 5월에 발표한<독립당촉성운동에 대한 선언>등으로


시작하여 1935년 7월 5일에 성립되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연결되는 민족협동전


선운동의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은 당명을 사용하지 않았던 문제


와는 관계없이 다른 독립운동정당과 동일한 자격과 위치에서 제 역할을 발휘했다.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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