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이후 해외에서의 독립운동..08편

08편


*** 한중연합항전


** 중국의용군과의 연합



중국 동북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들은

한국이 일제에 병합된 뒤 지속적으로 중

국 동북의 군벌과 국민당 정권에 한중연합항전을 호소했다. 실제로 1931년 6월 경

국민부 吉黑(길흑)특별위원회 위원장 金履大 (김리대)등은 중국 길림성 당국자와접촉하고 공산당의 소탕과 조선혁명 지원, 일제 驅逐(구축) 및 주구기관과 주구배 파괴·박멸 등을 밀약한 바 있었다. 또 비슷한 시기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겸 군총사령 현익철은 길림에 가서<東北韓僑情勢一般>(동북한교정세일반)과<中韓(중한)민족 합작의견서>를 제출하고한중연합투쟁을 제의하였다.

하지만 그해 7월 萬寶山(만보산) 사건이

발발하고 8월 말 현익철이 瀋陽(심양)에

서 일제에 체포되는 등 상황이 악화되어

이 계획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중국인이나 중국 관헌들이 일제의 직

접적 침략책동이 없는 한, 일본과 충돌하

여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던

이유도 컸다. 그러나 1931년 9월 18일 일

제가 만주를 전면 침공한 ‘9·18사변(만주

사변)’이 일어난 뒤부터 한중합작문제는

큰 진전이 있었다.


조선혁명당과 군의 주요간부들은 1932년

1월 19일 新賓縣(신빈현)에서 당면 대책

회의를 개최하다가 일본 경찰과 중국 관헌

의 습격을 받고 대거 체포되는 불상사를

겪었다. 이 때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李浩源,(리호원) 군 사령관 金保安(김보

안)(일명 金寬雄,(김관웅) 본명 金俊澤

(김준택)), 부사령관 張世湧(장세용)(본명

張元濟(장원제)),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

원장 李鍾建(리종건)(본명李鐘淳(리종

순)), 朴致化(박치화)·李奎星(리규성) 등

핵심간부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또 이후

3월 초 까지 계속된 일본 경찰의 검거로 국

민부와 조선혁명당·군의 관계자들은 모두

9개현에서 80여 명이 검거되는 커다란 타

격을 받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를 겪은 뒤에도 조선혁

명당·군·국민부는 高而虛(고이허)와 梁

世奉(양세봉)·梁基瑕(양기하)(호는 荷山

(하산) ) 등 피신한 간부들에 의해 곧 재건

되었다. 이 ‘신빈사변’ 이후 국민부 중앙집

행위원장은 양기하, 당의 위원장은 고이

허, 군사령관은 양세봉이 분담하였다.

조선혁명군은 이후 신빈·통화·환인 등

방부대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40

0여 명의 편제를 갖추고 사령부를 신빈현

왕청문에 두는 한편, 남만주 각지의 유력

한 중국인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연대를 모

색하였다.


특히 9·18사변 이후 일제가 중국 동북을

점령하고 1932년 3월 1일 괴뢰국가인

‘滿洲國’(만주국)을 세우자 중국 동북 각

지에서는 구 동북군벌계의 중국의용군은

물론 마적, 大刀會(대도회)·紅槍會(홍창

회) 등 종교집단 계통의 각종 항일부대까

지 대거 봉기하는 국면을 맞이하였다. 양

세봉을 비롯한 조선혁명군 간부들은 이러

한 기회를 맞이하여 중국의용군과 공동투

쟁의 방략을 적극적으로 강구하였다.


1932년 3월 초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은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중국인 王(왕)彤

(헌)軒과 梁錫福(양석복) 등 대도회 세력

이 이끄는 의용군과 연대하여 공동투쟁키

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같은 달 6일 조선

혁명군은 이들과 함께 遼寧農民自衛團

(료녕농민자위단) (일설에는 요녕민중자

위단)이라는 한중연합의용군을 조직하여

남만의 유하현 四鋪(사포)炕에서 선포식

을 거행하고 연합군의 봉기를 내외에 천명

하였다. 이 때 사령관은 왕동헌, 부사령관

은 양세봉이 맡았는데, 전체 병력은 2,000

여 명이나 되었다. 이 달 11일 조선혁명군

은 요녕농민자위단 부대와 함께 근거지인

왕청문에서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첫 출정

을 단행하였다. 이후 조선혁명군은 신빈현

南(남陡(령)嶺에서 신빈에 주둔하고 있던

괴뢰 만주국 공안대와 격전을 치른 뒤 신

빈의 西永陵街(서영릉가)를 점령했다. 그

리고 계속해서 신변현의 木奇(목기)·黑牛

(흑우)·上夾河(상협하) 등 여러 고을을 점

령하고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전투

는 조선혁명군이 중국항일의용군과 연합

항전을 개시하는 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는 조선혁명군이 각 지

방에서 분산활동하고 있던 병력을 집결시

켜 체제를 재편성하고 한중연합군을 편성

하여 본격적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나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혁명군이 요녕농민자위단의 일원으

로 투쟁하고 있을 때 北京(북경)에서 결성

된 ‘동북항일민중구국회’에서는 만주의 항

일투쟁을 촉진하기 위해 환인현에 주둔하

고 있던 구 동북군부대 지휘관 唐聚五(당

취오)등 동북정권 관련자들에게 밀사를 파

견하여 봉기를 촉구하였다. 특히 9·18사

변 직후 관내로 피신했던 중국국민당의 동

북군 수뇌 張學良(장학량)은 항일의지가

굳은 당취오를 방어군(요녕육군 보병 제1

단) 단장으로 임명하고 적극 후원하였다.

이리하여 국민당 특파원 王育文(왕육문)·

李春潤(리춘윤)및 王鳳閣(왕봉각) 등 유

력자들과 동변도 10개현 대표 30여 명이

3월 21일 환인현에 모여 ‘遼寧民衆救國

會’(료녕민중구국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조직 아래에는 정치 및 군사의 두개 위

원회가 있었는데, 군사위원회 아래 ‘요녕

민중자위군’ 총사령부를 두었고, 당취오가

군사위원회 위원장 및 총사령을 겸직하였

다. 이 때 신빈 東大營(동대영)에 주둔하

고 있던 구 동북군의 영장 이춘윤이 군사

위원회 위원겸 제6로군 총사령이 되었다.

조선혁명군이 참여해서 같이 싸우고 있던

요녕농민자위단 사령관 왕동헌은 추후 이

소식을 듣고 이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 결

과 조선혁명군은 왕동헌 등의 부대와 함께

요녕민중자위군의 제11로군으로 편성되

었다. 조선혁명군은 이 연합부대에 참가했

지만, 독립군으로서의 독자적 지위를 분명

히 하기 위해 새로운 작전협정을 요구하였

다. 즉 4월 29일 참모장 김학규를 환인에

파견하여 요녕민중자위군 총수 당취오 등

과 한·중 양 민족의 연대투쟁 문제를 협상

케 했던 것이다.


이 협정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제5항으로

서, 조선혁명군이 장차 한국내로 진격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원대한 목표

를 세우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

한 목표의 수립은 조선혁명군이 중국의용

군과 같이 일제와 싸우는 한편, 지속적으

로 국내침투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

실로도 증명된다.

실제로 1932년 한해 동안 조선혁명군은 1

6차에 걸쳐 101명의 대원을 국내로 침투

시켜 군자금의 모집과 일제 기관의 습격,

친일파 처벌 등의 투쟁을 벌였다.628) 이

수치는 일제 당국에 포착된 경우만 밝혀진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32년 3월

결사대원 李先龍(리선룡)을 국내로 파견

하여 군자금을 모집케 한 경우였다. 이선

룡은 양세봉의 특명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

여 東一銀行(동일은행) 장호원 지점을 습

격했다. 그는 13,000원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을 빼앗았으며 충청·경기·강원 일대

의 치안을 교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

는 일인 경찰과 교전하여 중상을 입히는

등 크게 활약했고, 비록 4월 5일 체포되고

말았으나 그가 일으킨 파문은 매우 컸다.

조선혁명군은 요녕민중자위군의 일원으

로 투쟁하면서 자주적 협정을 체결하고 공

동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뒤 이 부대는 요

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편

성되었고, 총사령관 양세봉은 특무대 사령

으로, 金光玉(김광옥)은 선전대대 대장으

로 활동하였다. 이 독립군부대가 이렇게

편성된 것은 중국군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우수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특무대는 8개 산하부대로 편제되었다.

이후 조선혁명군은 1932년 10월까지 다

른 요녕민중자위군 부대와 함께 공동으로

거의 200여 차례의 대소전투를 치르며 크

게 용맹을 떨쳤다. 조선혁명군은 이 무렵

요녕민중자위군 사령부이자 임시항일정

부인 ‘요녕성정부’ 소재지인 通化(통화)

(江甸子)(강전자)에 속성군관학교를 설치

하여 400여 명의 장교 및 병사들을 양성하

였다. 이 때 조선혁명군은 중앙군(현역, 정

규군)과 지방군(예비역)으로 구분되어 있

었는데, 중앙군의 규모는 300명 가량이었다.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1932년 한해

동안 조선혁명군이 중국의용군과 함께 전

개한 주요 전투를 간단히<표 1>로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대활약으로 남

만일대에서 조선혁명군의 명성은 크게 높

아졌다. 또 300여 명의 조선혁명군은 193

2년 9월 양석복이 거느리는 대도회군과

함께 대도시인 撫順(무순)공략전에 참가

하여 일·만군과 격전을 치렀다.

물론 이밖에

상세히 알려지지 않은 전투도 많다. 우리

는 이를 통해 조선혁명군이 중국의용군과

함께 매우 다양한 항일투쟁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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