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민회

"조선국민회"는 1917년 3월 평양에서 평양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 출신자와 재학생 및 일부 교사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청년학생의 항일비밀결사였다.

조선국민회 결성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일환
은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1914년 9월 미주 하와이에서 이 지역 한인사회내에서 독립운동의 중심적 지도자로 큰 영향력을 가진 박용만을 만났다.

장일환은 박용만과 협의를 거쳐 국내에 청년단체를 조직하고 국내외가 상호협력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15년 4월 비밀리에 귀국한 장일환을 1차로 하와이 국민회원으로 활동하다 앞서 귀국한 강석봉·서광조와 접촉하였다.

이어 1915년 겨울 2차로 안동현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세빈
을 만나 박용만과 협의된 계획을 전하고 동지로 포섭하였다. 당시 백세빈은 중국 안동현에서 국내와 중국 및 미주지역과의 연결거점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어 장일환·강석봉·서광조 및 백세빈은 비밀결사조직에 관해 협의하고 일차 계획으로는 우선 운동에 필요한 자금조달방법과 운동근거지를 간도지역에 구축해 장래에 대비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실천에 옮길 즈음 국내에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관련인사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므로 이를 잠시 보류하고 회원 각자가 비밀리에 조직확대 및 동지규합에 힘쓰면서 조직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주력하기로 노선을 변경하게 되었다.

그 뒤 1917년 3월 23일 평양 신양리에서 장일환 등 10여 명이 모여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장일환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조직구성과 그에 따른 임원 선출 및 간단한 시행세칙을 마련하고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조선국민회가 내세운 궁극적인 목적은 구미세력의 동양진출과 더불어 점차 제국주의화하는 일본이 장차 동양침략 즉 중국에로의 침략을 위한 패권쟁탈이 머지않다고 보고 이를 적기로 이용하여 자주독립을 달성하려 함에 있었다.

 조선국민회의 조직구성을 보면 회장에 장일환, 통신겸 서기에 배민수·안동현·백세빈, 경상도·전라도·황해도구역장으로 오병섭·강석봉·노선경을 각각 임명하였다. 체계적으로 정비된 형태는 아니지만 크게 두 가지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첫째, 본부격인 평양지역은 회장이 담당하고 그 외 지부적인 성격으로 각지에 구역장을 두어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으로 확대 발전시키려 한 면모를 나타낸다. 다음으로 내외통신 즉 국내외의 연락기구 설치에 중점을 둔 기구편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해외의 독립운동세력 특히 하와이 국민회와의 긴밀한 연계를 주요사항으로 했던 것과 아울러 중국 간도지역에의 조직확대를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간도지역 진출은 초기 조직과정에서 토지매입 및 근거지 구축방안도 시도한 바 있음으로 미루어 이 지역에 장기적 투쟁을 대비한 기지구축포석의 일환으로 보인다.


회원은 일반회원과 준비회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조직의 운영은 매년 봄에 정기적인 회의를 개최하기로 정하고 조직의 비밀보장을 위해 평양신학교 및 숭실학교가 개교하는 시기를 이용키로 하였다. 조직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각 회원이 갹출하는 회비로 충당하며 그 외 별도로 운동자금모집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회원상호간에 사용할 암호와 비밀문서 작성요령까지 마련해 두었다.

조선국민회는 국내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이면서도 하와이 국민회나 하와이 국민군단과 깊이 관련된 조직으로서 일면 국내지부적인 성격을 띤다. 실행세칙 중

첫째가 재미국민회와의 연락도모였던 사실과 암호 중 특히 하와이에 대한 암호를 작성하고 있는 점이다.

둘째, 박용만이 주필로 활약하고 있는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국민보
≫의 배포를 중요활동으로 전개하고 있었던 점이다.

그런데 하와이 국민회를 이끌던 박용만은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되 필수적 요소로 국민의 2대 의무를 들고 있다. 이런 입장을 독립운동노선에 적용할 때 한인교포의 의무금제와 독립전쟁을 위한 군사의무의 하나로 상무주의 강조로 나타난다. 따라서 하와이 국민회와 연계된 조직으로 보이는 조선국민회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보인다.

조선국민회의 구성원은 20∼30대 초반이 대부분이고 10대도 4명이나 포함된 독립의식이 확고한 청년들이며 학력은 숭실대학 출신 5명·숭실대학생 2명·숭실학교 출신 4명·숭실학교 학생 4명 그 외 평양신학교 출신자 1명·경성 연회전문학교 학생 1명·군산 영명중학교 학생 1명 등이다.

회원 대다수가 숭실학교 관련된 인물로 이들이 조직을 이끌어 가는 데 주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국민회는 숭실학교 관련자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그 외 평양신학교·경성 연희전문학교·군산 영명학교 학생 등도 함께 참여함으로써 각지 지식청년들을 연합하고자 계획한 면도 참작할 만하다. 또한 회원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서당교사로 활동한 이도 적지 않아 일선 교육현장에서 구국교육 실현을 통해 민족의식고취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회원 중에 기독교장로·교회조사 등이 있고, 신학교출신자, 기독교계통의 학교인 숭실·영명·연희전문학교 관련자들이 중심인 것으로 보아 대다수가 기독교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국민회가 당시 민족적 활동조차 철저히 봉쇄된 국내 현실 속에서 조직결성이 비교적 용이한 학교나 종교집회를 적극 활용한 측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조선국민회는 동시대에 결성·활동한 비밀결사들과 마찬가지로 전국적 조직을 지향했으나 서북지방 일대가 중심적 거점으로 국한되었던 것, 회원 수도 20∼30여 명으로 나타난 것, 학연·지연 및 종교조직을 통해 조직을 결성한 것 등은 여타 비밀결사와 같다.

조선국민회의 활동은 근거지 구축과 조직확대 및 교육활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근거지 구축은 조선국민회의 결성 초기단계에서 계획했던 방안으로 간도지역에 토지를 구입하고 회원으로 규합한 동지를 이주시켜 장래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려던 것이었다.

이런 방침에서 일찍부터 국민회 회원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신민회의 국외독립군기지 창설이란 독립운동전략을 계승했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 그 실천단계에서 구상된 자금동원방안이 무모한 측면도 있으나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란 국제정세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려던 의도가 돋보인다.


보다 두드러진 활동은 조직확대와 회원모집 등을 통한 세력 강화였다. 즉 국내조직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평양에 근거를 두고, 경상도·전라도·황해도지역에 지부 성격의 구역장을 설치하고 각 지역에 연고가 있는 회원을 배치하였다. 즉 경상남도 고성군 출신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오병섭을 경상도 구역장에, 전남 목표출신으로 하와이에서 국민회원으로 활약하다 귀국한 강석봉을 전라도 구역장에, 황해도 재령출신으로 구역에서 회원모집에 노력하면서 그 지역에 국민회 세력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 목포·보성일대에 다소 근거가 마련되었다.

국내뿐 아니라 하와이 국민회와의 연락을 계속하는 한편 국민회 회원을 비밀리에 미주로 파견하려고 계획하였다. 미주지역으로의 파견을 군사양성계획의 일환으로 군사학교에 입학시키면서 일면 국내조직과의 원활한 연락거점으로 활용하려던 의도에서 계획되었다고 보이나 실천에 옮기기 전 조직이 발각되었다.

또한 중국지역으로의 기반확대를 위해 안동에 외국통신원을 배치하였는데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백세빈이 이를 맡게 되었다. 아울러 북경에도 1명의 통신원을 배치, 북경지역과도 연계를 계획하였다. 1917년 7월에는 간도지역과의 연락통신을 위해 추가로 로선경
을 서간도 삼원보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조선국민회는 조직기반을 확대해 가는 한편 회원간의 단결을 강화시키고 장차의 독립쟁패기회에 대비하여 무력준비계획도 수립해 두었다.

특히 회원들간의 단결의지를 공고히 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의지를 표명코자 혈서를 써서 맹약하는 이들도 다수 있었다.

배민수·김형직·노덕순 등은 식지를 잘라 ‘대한독립’이라 혈서하고 어떤 이는 ‘결사’라고 혈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의지 강고한 청년을 뽑아 회원으로 가입시켰으며 이후 이들을 항일투쟁의 역군으로 육성키 위해 중국 각지의 무관학교에 입학시킬 것을 계획하고 1차로 배민수를 중국 무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중국지역으로 파견하였다.

군사학교에의 입학추진계획과 아울러 무기구입 및 군자금조달을 위한 계획도 별도로 세웠다. 조선국민회의 중심인물들은 우선 무기를 구입키 위한 자금마련의 방안으로 각지의 유지를 물색한 후 회원으로 가입시킨 뒤 그에게 군자금을 출자케 하여 그 자금의 일부로 권총을 구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목적달성 이전에 조직이 발각됨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무력기반조성계획이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무기구입계획, 암호를 사용한 비밀결사인 점, 그 암호가 독립군적 성격인 점, 회원들을 무관학교에 진학케 한 것들로 미루어 보면 이 조직이 계몽주의적 성격의 결사가 아니라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항일독립정신을 학생 및 일반인들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하였던 바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국민보≫의 배포활동과 교육현장에서 종사하던 교사들을 통한 민족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국민회의 활동을 통해 볼 때 이들이 지향한 운동방략은 계몽주의적 측면도 나타나지만, 독립군적 성격의 암호를 사용한 점, 무기구입 등 무력양성계획을 수립한 점, 독립전쟁론을 일관한 박용만과 협의해 조직된 청년단체인 점등으로 보아 독립전쟁론적 방략이 주된 흐름이었다.

조선국민회는 1918년 2월 경 일제당국에 발각되어 중국으로 도피한 사람도 있었으나 그 중 25명은 체포되었으며 장일환 등 12명의 중심인물은 재판에 회부되어 최고 3년형까지 받게 되었다. 비록 조선국민회가 일체측에 의해 발각되어 해산되기는 했으나 그 결사의 조직기반은 잔존하여 3·1운동 당시 평양중심의 시위운동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1919년 9월에는 박인관
이 중심이 되어 대한국민회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도 하는 등, 회원 각자가 독립운동에 헌신, 활동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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