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에서 한국전쟁의 비극..02편

02편





1980년대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뚜렷한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reak)

과 전환의 시대였다. 이 단절과 전환은, 강한 반공주의가 지배하는 이념에 의해 재

되어 온 한국적 학문현실을 고려한다면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나 패러다

적임의 전환이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이 전환은 학문 영역에서의 독자연구의 축적, 또는 시각의 전환으로 인

해 나타난 현상은 아니었다. 현실의 충격

이 가장 중요한 계기를 형성하였고, 또 제공해주었다. 그 결과 보수와 진보, 정통

과 수정, 기성과 도전이라는, 경쟁하는 패러다임의 어느 쪽이었든지 간에 80년대

처럼 학문이 현실의 근접거리에 위치하며 전개된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그것은 ‘

시대변화의 추동요소’의 하나였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시대변화의 산물’이었

다.


1980년 5월 호남의 중심도시 광주에서 한국전쟁과 4월혁명 이후로 최초로 민중항

쟁과 비극적인 대규모의 인명살상이 자행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신체제에 저

항하는 부마사태로부터 시작되어 박정희 암살과 12·12쿠데타, 그리고 서울의 봄

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격변적인 민주화 흐름을 역전시킨 안티클라이막스로서의 광

주사태는, 권위주의 시대가 종식되고 찾아들었던 낙관적 전망을 일거에 무너뜨렸

다.



군부가 재집권에 성공한 이후 학생들과 재야를 비롯한 민주화세력은 실패가

초래한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었고, 새로이 집권한 신군부는 강요된 안정적 토대

위에 강력한 철권통치를 행사하였다. 전국적 시위로 이어졌던 1960년 4월혁명의

경우 독재정권이 퇴진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시민저항이 정의 효과를 나타내었으나

부마사태 이후 전개되던 민주화의 흐름을 역진시킨 부도덕한 정권의 등장과정에서

발생한 살육은 민주화의 실패로 인해 훨씬 더 깊게 일반 시민과 지식인들의 정신

을 갈라놓았다. 상처의 크기와 깊이 측면에서 두 사태는 비교되지 않았다.


이념 대결의 성격을 갖는 전쟁과는 달리 그러한 요소가 없는 상태에서 내국인을

상대로 자행된 살육을 통한 군부의 정권장악 과정은 심대한 영향을 끼치며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식의 기준을 과거로부터 현재(적 과제)로 일거에 끌어내려

놓았다. 현재의 실천적인 요구의 눈으로 과거의 사태들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하였

던 것이다. 80년대 벽두 침묵의 시기가 지나자 학생들은 재빨리 수많은 소그룹과

써클을 조직하여 새로운 시각들의 저작들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맑스주의-레닌

주의 저작들이 ‘커리’(커리큘럼의 준말)라는 약칭으로 불린 학생들의 필수 독서목

록에 올랐고, 동시에 정치경제적 방법론과 혁명적 시각에서 사회를 분석하고 접근

하는 저작들이 광범하게 읽혔다.



그것들은 또 하나의 강의실 역할을 수행한 교내

써클실과 교외 토론장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읽혀나가기 시작하였다. 대학원생들과

진보적 이론가들, 교수들, 연구자들 역시 때로는 전공별로 때로는 주제별로 각종

세미나와 토론회를 통해 대안적 시각들을 체계화하려 노력하였다.


광주의 비극 이후 특히 분단과 통일, 외세와 자주 등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은 급격

하게 전환되어 기존의 공식적 시각과 해석들은 정반대 시각과 해석의 도전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광주의 비극은 그만큼 결정적인 정신사적 전환을 가져왔던 것이

다. 요컨대 광주 이후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더 이상 과거의 눈일 수 없었

다.”(참조) 손호철, 「5·18광주민중항쟁의 재조명」(한국정치학회 편, 『한국

현대정치사』, 법문사, 1995), pp.481~482.    내부의 민주주의 실현의 문제가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는 인식과 눈뜸은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적 제약조건으로 작

용하고 있는 분단구조와 민족자주의 문제로 상승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사태는

전후 민족문제 인식과 분출의 가장 결정적인 분수령을 이루었던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성장과 함께 진행되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에 대한 의식이 강렬해

지면 질수록 광주의 비극은 시간적 거리를 뛰어넘어 곧바로 그러한 모순 구조를


초적으로 주형한 해방과 분단 초기의 환희와 좌절을 연상케 했다.



80년대 내내 학계와 현실운동 모두에서 민주주의와 함께 분단, 민족주의, 민족자

주, 통일, 전쟁과 평화의 문제 등 광의의 민족주의 담론은 가장 강력한 대안적 언

체계의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민족주의 담론은 ‘정념과 정의, 열정

도구’로서 뿐만 아니라 ‘과학과 비판, 실천의 무기’로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최초 해방과 분단에 대한 재인식으로부터 출발한 비판적 지식 작업들은 점차 현대

국의 모순구조의 최종적 결절인 한국전쟁에로까지 연결되었다. 분단국가의 근본

재이유(raison d'etre)가 공산주의의 침략을 저지시켰다는 시각으로부터 주어져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전환은 대안적인 지적 도전이 급기야 전후질서의 정당

성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남북한의 출발점이었던 해방·분단

·한국전쟁에 대한 재인식은 단순히 그 사건들에 대한 재해석을 넘어 남한과 북한

의 체제정통성, 식민시대, 국가형성, 전후 사회발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등 모

든 문제를 과거와는 달리 보게 되는, 세계관과 사유구조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

했다.



   이상..   다음편에서 ~
당시의 대안시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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