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신화..(하) 마지막편

하편     ( 마지막 )


입에서 입으로 더욱 과장되어




유격대원들과 함께한 김일성(가운데). '전설'은 그의 군사활동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고 구전되는 속에서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은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이후에는 조선인 이민사회에까지 유포됐다.


그런데 김일성의 전설에서 주목해야 할 것

이 전설의 내용이 완전한 허구만은 아

니라는 점이다.
식민지 시대 말기의 김일

성 전설은 사실 전설 형성의 첫 단계를 밟

고 있었다.



전설 형성의 첫 단계에서는 전설의 내용이

‘사실과 사실의 과장에 의한 전설적 전환

이 함께 이야기되는’ 시기로 ‘사실에 관한

것이기도 하면서 사실의 전설적 전환이라

고 할 만한 것도 섞여 있는’ 상태에서 ‘일단

과장이 시작되면 상상력이 발동되어’ 더욱

윤색되어가는 것이다.


즉 당시의 대중은 김일성의 군사활동에서

무언가 신기하고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것

이 있으면, 이를 부풀려 이야기했고, 이렇

게 과장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더욱

과장되어 전해졌다.


대표적인 예가 축지법에 관한 것이다. 193

9년 5월 함경북도 무산 지구에 진출할 당

시 김일성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일제가

닦아놓은 갑산과 무산 사이의 갑무경비도

로를 100여리가량 백주에 행군하여 두만

강 연안의 무포로 진출하였다.


일제는 국내에 진출한 김일성 부대가 감히

자신들이 닦아놓은 경비도로를 백주에 행

군해 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산악지

대에 포위망을 쳤는데 김일성 부대는 어느

새 멀리 무포 일대에 나타난 것이다.



일제에야 길 닦아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는 격이 되었지만, 이러한 사실은 대중에게 축지법에 대한 신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좋은 소재였다.


또 분신술의 경우 토벌대 사령관이었던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의 증언과 같이 “김일성 부대는 여러 개의 분대로 나누어 행동하면서 저마다 김일성 부대라고 칭해 이쪽에도 저쪽에도 김일성 부대가 있는 것 같은 위장전술을 잘 썼던 사실”과 관련이 깊다.


실제로 김일성 휘하의 제2방면군 7단장 오중흡은 일.만 군경의 토벌이 극심했을 당시 자신이 이끄는 7단이 마치 2방면군 사령부인 것처럼 위장하여 토벌의 예봉을 김일성이 아닌 자신들에게 돌리도록 하는 위장전술을 쓰곤 했다.


솔방울로 폭탄을 만든다는 신화는 동만의 조선인 군중과 유격대의 자력갱생의 노력과 관련이 있다. 거의 맨손으로 유격전쟁을 시작한 동만의 조선인 군중은 창의력과 굳은 의지로 흔히 연길폭탄이라고 불리는 작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대중은 김일성 부대나 그와 연관된 유격대의 활약을 보면서 이를 과장하고, 전설을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전설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하고 고무되었던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줄 영웅을 기다린다. 19세기 말엽 이래 영웅 대망론이나 영웅 예찬론은 한국의 일반 민중뿐 아니라 지식인, 민족운동가에게도 널리 퍼진 중요한 화두였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영웅에 대한 전기의 출간은 이를 증명한다.

그러면 왜 하필 김일성이 대중의 영웅 대망론의 주인공으로 부각되었을까? 사실 대중은 김일성에게만 특별히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한 말의 심남일(沈南一)이나 전해산(全海山) 같은 의병장들의 예에서 보면 대중은 이들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몇 차례 승리하면 날개를 달아주고 도술을 부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에 패배하여 잡혀 죽음으로써 대중이 달아준 날개와 도술을 그들의 육신, 그리고 대중의 기대와 함께 땅에 묻었다.


영웅 설화의 특성상 군사 활동과 결부되지 않고서는 영웅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조직, 선전 활동에 치중해온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이나 외교활동에 주력해온 국외의 민족주의자들은 대중의 일정한 기대를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영웅 설화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의병항쟁에 이어 만주에서는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하여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 양세봉(梁世奉) 등 수많은 독립군의 지도자들이 명멸해갔지만 김일성이 대중의 영웅으로 부상한 1940년대 초반 이들은 이미 사망했거나 활동을 중단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인물전설이란“과거의 인물을 회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고 현재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하며 듣는”것이기 때문에 인물전설을 만들어내는 대중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난날의 영웅보다는 살아 있는 영웅에게 기대를 집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임종석, 신창원, 김일성…

 

김일성에 대한 민심동향을 담은 일제 관헌과 경찰부 자료들."김일성 부대는 위장전술을 잘 썼다"는 기록은 축지법 신화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추측하게 해 준다.




소련군 시절의 김일성과 빨치산 동료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김일성.

 


김일성이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1940년대 전반의 식민지 조선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이렇다 할 인물이 없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1910년대와 1920년대 문화계의 스타였던 이광수(李光洙)나 최남선(崔南善)은 이미 노골적인 친일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영화 <아리랑>의 감독이자 주연이었던 나운규(羅運奎), 대중가요 <눈물젖은 두만강>의 김정구(金貞九), <황성옛터>의 고복수(高福壽), <사의 찬미>의 윤심덕(尹心悳),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 사이클 선수 엄복동(嚴福童) 등이 1920년대, 30년대의 대중스타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들은 대개 비극적인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었다.


기쁨과 대리만족을 줄 수 있는 오늘날의 의미의 대중스타는 식민지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바로 이런 시기에 대중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스타로 부각할 수 있었다. 서태지도, HOT도, god도, 비틀스도, 마이클 잭슨도, 이승엽도, 마이클 조던도 없던 시대, 그 시대를 김일성이 강타한 것이다.


1989년 여고생을 대상으로 한 <하이틴> 잡지의 인기도 조사에서 1위를 한 사람은 매일같이 매스컴의 조명을 받는 기라성 같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가 아닌 전대협 의장 임종석(현재 민주당 의원)이었다.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아온 여고생들이 임종석에 매료된 것은 그의 통일운동을 지지해서는 아니었다. 임종석이 인기인이 된 것은 수배중인 그가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신출귀몰하며 여러 집회에서 연설하면서 경찰을 웃음거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매스컴과 대중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1990년대의 임종석이 불과 1년여의 신출귀몰한 도피행각 때문에 기라성 같은 인기인을 제치고 일약 스타가 될 수 있었다면, 신창원이 불과 몇 달간 경찰의 추적을 따돌린 바람에 그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까지 출간될 수 있었다면, 단순한 도피 행각이 아니라 철통같은 국경 경비망을 뚫고 조선인 유격대를 거느린 채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 일제 토벌 제일의 목표가 되어서도 끝까지 항쟁하며 살아남은 김일성, 그리고 마땅히 인기를 다툴 만한 대중스타도 그다지 많지 않았던 시대를 산 김일성에게 얼마큼 폭발적인 인기가 집중되었을 것인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흔히 이북이나 중국의 사회주의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할 때 자본주의의 충분한 발전을 경험하지 못한 사회에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사회주의를 건설한 것을 꼽는다. 그런데 이북이 갖는 문제점은 단순히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었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북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 주도세력인 유격대원 출신들은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세력 중에서 교육이나 근대문명의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집단 출신들이었다. 물론 간도라는 지역은 식민지 조선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는 데에서 중요한 길목 역할을 한 곳이지만, 유격 근거지의 주민들의 대다수는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문맹들이었다.


더구나 유격근거지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중 지식인들이나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층들은 민생단 숙청 시기에 집중적인 타격을 받았다. 민생단 사건이 종료될 무렵 동북항일련군 제2군 소속의 조선인 대원들 중 중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특히 김일성에 절대적인 충성을 보인 사람들은 그나마 유격대원 중에서도 신문물의 세례를 가장 받지 못한 사람들로서 상당수는 김일성에게서 글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이북 정치문화의 어두운 그림자


1930년대 후반 이후 김일성은 그 자신의 유격활동을 통해 전설적인 명장으로 부각되었다. 일제 식민지 통치의 막바지에 대중의 김일성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으며, 이 같은 기대는 김일성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에 반영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군웅소설을 연상케 하는 이런 초자연적 능력에 관한 전설들은 주로 장백이나 풍산 등 문화적으로 낙후한 외진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김일성의 주된 활동 무대도 바로 이런 지역이었다.


이 사실은 김일성에 대해 열광적인 지지와 기대를 보낸 층의 의식이 반일정서는 매우 강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매우 낙후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앞으로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된 근대교육이 일제의 노예교육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근대교육의 세례를 좀 더 많이 받은 층일 수록 일제의 식민지 동화정책에 오랜 기간 포섭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제가 가진 근대적인 군사경제력의 힘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압도되어 독립의 꿈을 포기하는 경향이 좀 더 큰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는 전설의 주인공이 되고 그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이런 카리스마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김일성 주변의 유격대원들이 이북의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식민지 시기 저항민족주의의 가장 견결한 담당층으로 새로운 국가건설의 주역이 된 인물들이 문화적으로는 매우 낙후한 집단에 속해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할퀴고 간 깊은 상처로서 이북의 정치문화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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