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역사적 기원~뿌리..2편 (마지막편)

2편.           마지막편


※   외적 지지의 획득 : 보천보·홍기하 전투

미혼진 회의에서 '웨이정민'(위증민)은 중국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중국인과 조선인을 별도로 나누어 부대를 조직하려 했다. 이러한 방침을 내세운 이유에는 과격화된 반민생단투쟁의 열기에서 ‘선량한’ 조선인을 보호하려는 의도와 동시에, 일제와 협력했으리라 의심되는 조선인 친일파의 공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 있었을 테다 하지만 김일성은 이러한 분리 조치가 오히려 조중 양국의 불신을 더욱 방조하리라 생각했고, 이를 반대했다.

이에 따라 미혼진 회의의 결과는 무장투쟁 부문에서는 크게 기존과 달라진 바가 없었다. 하지만 무장단체와는 별개로, 반일단체를 민족별로 조직한다는 제안은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곧
‘재만한인 조국광복회’라는 조직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36년 7월, 조국광복회는 정식으로 승인되었고 이에
동북항일연군 제1군과 제2군을 합쳐 1로군이 탄생했다. 여기서 김일성의 부대는 연합부대의 제6사가 되었다.



조국광복회 창설 이후 진행된 가장 큰 전투는 "무송현성 전투"였다. 김일성의 제6사를 포함한 동북항일연군은 무송현성을 공격해 이후에는 장백현에까지 진출하려 했다. 그 수효는 총 1,800명이었으며, 8월 16일에 이루어진 6사 부대의 기습이 전투의 효시였다.

김일성 부대는 16일 밤에 무송현성 서남쪽을 공격해 수비대를 격파하고 주둔군의 주의를 끌었다. 이후 17일 아침, 6사는 도시 내부로 진입을 시도했지만, 기존에 계획했던 내응의 실패와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일시 후퇴해야만 했다. 이에 일본군은 18일에 반격을 개시해 성문을 열고 출격했으나, 오히려 매복한 연합군의 공격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수비군은 관동군 본부에 구원을 요청해 비행기 2대까지 출격하게 되었지만, 그 시점에서 동북항일연군은 이미 전장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단순히 판단할 때, 무송현성 전투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동북항일연군의 패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이 전투로 크게 두 가지 이점을 획득했다.



확실히 무송현성 전투는 동녕현성 전투나 라자구 전투와 마찬가지로 반일부대 장병들에게 사상개조의 길을 열어준 충격적인 사변이였다. 그들은 이 전투를 치르고나서 처음으로 통일전선의 맛을 알게 되였다.




함남 국경대안인 몽강현과 무송현 등지에 근거를 두고 각지에 출물하든 련합공산군 약 일천명은 지난 십륙일 밤중에 무송현성에 습래하야 …(중략)… 그리고 무송연 송수진 시가에도 십륙일밤에 전긔공산군의 일부인 삼백명이 습격하엿는데 공산군은 이 시가지를 완전히 점령하엿다한다



첫째는 김일성의 회고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반민생단 투쟁에서 불거진 조ᆞ중의 적대감정을 일부 해소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전장에서 함께 공동의 적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함으로써, 조선인들은 단기간에 효과적으로 신뢰를 복구할 수 있었다.

둘째는 김일성의 전투 지도력을 입증할 수 있었음이다. 동아일보에서 언급하는 송수진 시가를 점령한 부대는 김일성의 제6사였다. 남만주 지역에서의 전과가 일제 치하 한반도 로까지 알려질 정도였다면, 김일성의 공격은 무성현성 수비대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무성현성을 점령하지 못한 책임은 김일성 보다는 총대장이었던
왕더타이에게 지어졌을 테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후 김일성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보다 자율적으로 보천보 전투를 기획하고 수행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즉, 김일성은 이제 동북항일연군 내에서 지휘력을 입증한 현장 전투 사령관이었다.



이후 동북항일연군은 대덕수 전투, 소덕수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과 교전을 지속했다. 1937년 3월에는 서강회의가 열렸으며, 여기서 국내 진공 작전이 논의되었다. 이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이 조선 독립 투쟁의 책무를 맡게 되었으며, 제2사, 제4사, 제6사가 공동으로 작전을 시행할 바를 결의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당시 장백현에서 근거지를 확보하고, 조선 내부로까지 조국광복회 조직을 넓히고 있었으며, 3명의 사장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김일성이 작전의 주도권을 잡았다.

곧 5월 중순, 김일성이 입안한 계획에 따라, 3개 사가 조선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으며, 최현의 제4사가 안도현을 공격하며 공격을 개시했다. 김일성 부대가 목표로 설정한 보천보는 작은 시골도시로 일본인 50명, 조선인 1,323명, 중국인 10명이 거주했고, 5명의 경찰만이 주재소에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보천보 20km 근방에는 혜산선 철도의 종점인 인구 1만 3천 명의 중요 거점, 혜산시가 있었다.

따라서 보천보를 습격한다면, 그 소식은 자연히 혜산을 거쳐 조선 전국으로 빠르게 전해질 수 있었다.
와다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천보는 게릴라 부대에게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심리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습격대상이었다.’



1937년 6월 4일, 6사 대원 90명을 인솔한 김일성은 직접 보천보를 공격했다. 여기에는 박금철을 비롯한 조국광복회 조직원들이 함께 했다. 전투 결과로 주재소의 경관들은 모두 도망쳤으며, 경찰의 자녀 한 명과 일본인 요리사 한 명이 사망했을 뿐이었다. 이후 김일성 부대는 점포, 주택에 침입해 물자와 현금을 탈취하고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전술적 성과는 전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지만, 이 사건의 반향은 곧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37년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사에서 보천보와 관련한 65건의 기사를 찾을 수 있는데, 그중 61건이 김일성의 보천보 습격과 관련한 기사들이다. 경성일보, 신한민보에서도 ‘雜花商を 銃殺の上放火 惠山鎭上流普天堡を全滅’[ 잡화상을 총살하고 방화 혜산진 상류 보천보를 전멸 '와' ]   ‘김일성 부대의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지면을 할애한 바를 볼 때, 사건의 파급은 해외까지 미쳤다. 일제하 가장 대중적인 잡지였던 '삼천리'도 이 조류에 함께했다.

그는 생각든 바와는 좀 달느게 匪賊首魁(비적수괴)답지 안케 音聲(음성)도 조용하고 태도도 우락부락하지 안엇다. 그는 金翁(김옹)을 여러 가지 말노 慰撫(위무)해가며 지금은 엄동이라 雪中(설중)寸步(촌보)를 옴길 수 없고 새 봄에는 꼭 老人(노인)님을 還家(환가)시킬터이니 안심하라고 하고 부하 간수에게 특별 우대하기를 명하였다고 한다. 金日成-匪賊首魁(김일성-비적수괴)인 그는 골격이 여무러 보이고 말 잘하고 뱃심 있어 보이는 그! 나이에 비해서 풍상을 겪은 지라 老熱(노열)해 보이는 그! 그는 마적 대장이라 자칭함이 그럴듯하더라고 金翁(김옹)은 여러 번 말하였다.



金日成(김일성) 부하로 5년 간이나 활약하든 여당원 두 사람이 일전에 귀순하야 나왔다는 말을 듯고 먼저 그들을 맞나려고 長白(장백) 協和會(협화회) 본부로 가서 여러 시간 기다린 끄테 겨우 그들과 이약이 할 기회를 어덧다. 朴.(박)

「그는 아직 27세 밧게 안 되는 건창한 청년입니다. 그를 처음 만나기는 昨春 撫松縣(작춘 무송현)에서 연합군 때부터인데 젊은 사람치고는 퍽이나 노련된 자임니다. 그의 기본 부대는 60명 밧게 안되나 其外(기외) 수백 명 보조대가 있음니다.



삼천리에서는 특파원까지 파견해 김일성 부대에 인질로 잡혔거나, 부대에 소속했었던 인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카마다 사와이치로의 증언에 따르면, 1943년에 그가 소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장 위대한 인물’을 투표하게 한 결과, 67%가 김일성이라 적어냈다. 이처럼 당대 조선인들이 김일성에게 열광한 까닭은 무엇일까? 보천보 전투 두 달 전,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는 ‘執拗凶惡の朝鮮共産黨遂に壞滅す’ ('집요흉악의 조선공산당이 괴멸했다.)라며 이재유와 체포와 함께 조선공산당이 궤멸했음을 선전했다. 하지만 6월에 김일성 부대가 국내로 진공하며, 일제의 공언은 허풍이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일제의 식민 통치가 20년이 넘었고, 소규모 테러 행위 이외에는 국내에서 무장 독립투쟁이 사실상 소멸한 상태에서, 김일성의 등장은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줬다. 김일성은 일제를 몰아낼 ‘영웅’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김일성 부대의 만주항일투쟁은 1940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태평양 전쟁까지 임박한 시점에서, 만주 지역에서의 활동은 더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토벌 작전은 맹렬했으며, 다수의 유격대원이 전사하거나 체포당했거나, 일부는 투항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꾸준한 전과를 올렸다.

1940년 3월 11일, 김일성은 화룡현 홍기하 목재소를 습격했다. 이곳은 화룡형 경방대대였던 '마에다 중대'의 관할이었는데,
마에다는 평소에도 ‘김일성의 머리는 내가 베어들겠다’며 김일성 부대를 향한 적개심을 드러냈던 인물이었다. 마에다 중대는 즉각 김일성 부대를 추격했지만, 그들은 이미 일본군 정찰병을 잡아 심문해 마에다 군의 정보를 습득한 상태였다.

이에 김일성 부대는 1940년 3월 25일, 매복 공격해
마에다 중대를 사실상 전멸시켰다. 일본 제국은 이 참담한 패배에 격노했고, 화룡현에 세워진 마에다 중대의 현충비에는 ‘김일성비의 머리를 베어들어야 한다’라는 원색적인 표현까지 쓰였다. 일제는 토벌 규모를 더욱 확대해, 조중 유격대 활동을 억제했으며 결국, 이들은 해방 이전까지 소련 영내인 하바로프스크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홍기하 전투는 동북항일연군이 만주에서 마지막으로 유효한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당시 만주 일대에서 일본군은 유격대와 농촌을 분리하여, 배후기지를 제거해 지원을 차단했다. 또한, 예산을 증액해 토벌대 규모를 늘렸고, 회유 역시 동반했다. 이미 항일투쟁의 어려움은 1938년의 ‘고난의 행군’으로 실감한 바였지만, 그럼에도 김일성 부대는 큰 전과를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국내에 크게 알려지지 못했는데, 만주지역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했으나 일제의 보도 통제 역시 함께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홍기하 전투와 관련한 기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포함해 2건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김일성 비단일파의 습격에 홍기하에서 대기 중이던 만주국군이 출동하여 토벌 중’이라는 내용이 전부다. 하지만 홍기하 전투를 통해, 김일성은 지휘관의 자질을 다시 입증했으며, 조선인 공산세력 내부에서 입지를 확고히 했다.



※  
해방 이후의 김일성과 혁명전통의 제도화

1942년 8월, 소련 영내에 주둔한 동북항일연군은 제88특별저격여단으로 재편되었다. 여단장은 '저우바오중'이었으며, 제1로군을 기초로 편성된 제1교도영의 영장은 김일성이었다. 조선인 중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인물은 '최용건'이었으며, 그는 김일성보다도 약 10살 연상이었다. 하지만 북만주에서 활동한 그는 조선 내에서 사실상 무명이었으며, 만주항일투쟁의 실전에서 얻은 김일성의 명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저우바오중(주보중) 역시 1942년 소련에 보고하며, “김일성은 가장 훌륭한 군사 간부이며, 중국공산당 고려인 동지 가운데 최우수 분자”라고 기술했다. 총대장이었던 저우바오중의 우호적 평가는 모스크바의 판단에도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메크레르 중좌'는 평양에 들어가기 전 빨치산 출신 조선인들을 일일이 면접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그는 김일성이 입북하자 비밀리 지방을 순회하며 ‘항일투사 민족영웅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또한, 당시 소련군 극동군 총사령부 정치국
소좌였던 '코바렌코'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스탈린을 모스크바에서 회견했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소련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라고 까지 말하며, 그를 결국 북한의 지도자로 ‘간택’했다.



하지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선택 ‘당했기’ 때문에 북한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고 판단하는 건 논리적 오류에 불과하다. 공산 진영의 수장국으로서, 소련의 의도는 분명 중요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이 가능하게 한 원천은 김일성이 만주항일투쟁에서 보여준 지도력과 그에 따른 당 내외부의 지지였기 때문이다.

김일성 부대의 유격대 활동이 사실상 1940년에 종결되었음에도, 한반도 인민이 김일성을 향해 보내는 지지는 여전했다. 가령
잡지 선구가 1945년 11월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차기 신정부 군무부장에 1순위로 자리매김했다. 김일성과 스탈린의 만남이 1945년 9월에 이루어졌음을 볼 때, 소련은 이러한 김일성의 인기를 반드시 사전 조사를 통해 염두에 두었을 테다.

더불어, 김일성을 향한 조선 인민들의 지지는 당대의 사상적 무지에서 기원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군정청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 인민은 사회주의를 70% 비율로 가장 지지했고, 다음으로 14%의 자본주의, 7%의 공산주의가 뒤따랐다.

이처럼 정치사상과 경제사상의 구분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좌파 세력의 선전은 민중에게 충분히 매혹적이었을 테고, 김일성은 이에 부수적인 지지 효과를 누렸을 테다.



김일성이 입북한 이후, 소련은 북한의 독자적 정당으로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10월 13일에 설치해 그의 위상을 강화했고, 12월에는 그를 분국의 책임비서로 임명해 사실상 북한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문화적인 부문에서도, 김일성을 향한 지지는 만주항일투쟁을 기초로 더욱 강화되었다. 가령 김일성이 등장한 첫 소설 『혈로』는 김일성 부대의 병사들이 압록강을 따라 행군하며, 강 건너 조국을 바라보는 풍경 묘사로 시작한다.

또한, 김사량은 보천보 전투를 극화한 〈뇌성〉을 발표했는데, 이는 혁명전통 주제의 첫 공연작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부터 김일성, 또는 북한 지도부가 혁명전통의 제도화를 추구했다고 보기는 힘드나, 이러한 추세를 꺼리지도 않은 듯하다. 다음은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이 〈뇌성〉 연습 과정에서 전한 말이다.



창작가들은 …(중략)… 항일의 혈전만리를 진두에서 헤쳐오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로고와 수령님의 위대한 혁명사상, 신출귀몰한 탁월한 전법, 고매한 덕성과 풍모를 더욱 깊이 체득하게 되었으며 이를 작품에 담기 위해 온갖 정열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만주항일혁명투쟁에서 얻은 지지를 기반으로, 김일성은 정권의 정당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었다. 또한, 해방 직후 소련 군정과 북한 정권이 행한 민주적 개혁과 토지 개혁은 남한 인민들의 부러움까지 불러올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김일성은 혁명전통을 제도화, 심지어 개념화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설 열병식에서 ‘혁명전통’을 언급하기는 했으나 이는 일제와 투쟁한 모든 조선인 독립 운동가를 포함하는 혁명전통이었다. 즉, ‘김일성 혁명전통’의 제도화는 그간의 지지를 바탕으로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1950년 개전한 한국전쟁의 실책으로 말미암은 지도자 권위의 하락이 주효하게 작용했을 테다.

이로 인해 당내에서도 외국의 후원을 담보한 소련파와 연안파의 견제가 더욱 심해졌으며, 이러한 갈등은
8월 종파사건으로 귀결했다. 따라서 김일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며, 원천적인 지지의 근원이었던 만주항일혁명투쟁을 기초로 자신과 빨치산 일파의 권위를 드높이려 했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1953년에 만주 일대로 학술조사단을 파견해 관련 유적과 유물을 조사, 수집했다. 이후 그는 1950년대 중반에는 제3차 당대회에서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 편찬하기 위한 사업을 강력히 추진할 바를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1960년대까지도 계속되었고, 각지에는 박물관들이 세워졌으며 청년과 학생, 성인 모두에게 혁명전통 교양이 실행되었다.
그리고 그 교재는 『항일빨찌산투쟁참가자들의 회상기』였다.



북한 학계도 이에 조응해, 『조선민족해방투쟁사』, 『조선근대혁명운동사』 등의 역사서와 다수의 논문이 출판되었다. 이러한 혁명전통은 후계자 김정일에 의해 수준 높은 제도화를 이루었다. 김정일은 김일성 혁명위업의 전면화를 위해 조선로동당력사연구실을 김일성동지혁명력사연구실로 개편했고, 『김일성동지혁명력사도록』을 새로 편찬했다. 또한, 그는 혁명전적지 답사행군을 더 장려해 인민들이 실제 장소를 체험하며 수령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와 더불어 김일성 가계의 상징화 역시 함께 일어났다. 가계는 혁명화되었으며, 북한 인민들은 김일성의 가정을 따라 배우며 적극 옹호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후의 강조 역시 만주항일투쟁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었는데, 김정일의 어머니인 김정숙 역시 ‘항일여투사’였으며 독립운동 중 만주에서 소련 영내로 건너간 후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혁명전통은 1972년, 국가주석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헌법에서 공개적으로 명시되며 법적으로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   또  생각해보면



만주항일혁명투쟁은 김일성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김일성이 처음으로 마주한 사건은 반민생단 투쟁이었다. 여기서 김일성 자신도 민생단에 연루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위기는 곧 기회였다. 김일성은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고, 다수의 조선인 공산당원을 구출했다. 이들은 해방 이후 ‘빨치산파’로 김일성과 함께하며 그의 든든한 지지 세력이 되었으며, 혁명유자녀들은 계속하여 우대받았다. 이를 통해 김일성은 만주 조선인 공산 집단에서 내적 지지를 획득했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권위를 바탕으로, 김일성은 보천보 전투와 홍기하 전투를 지휘할 수 있었다. 여기서 얻은 전과로 그는 한반도 전체에 이름을 알렸으며, 종국에는 소련의 후원까지 얻어냈다.



해방 직후, 김일성은 인민의 영웅이 되어 조선에 들어왔고 자연스럽게 북한의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인민들은 연극과 소설을 통해 그를 미화했고, ‘혁명전통’은 한국전쟁 이후 자연스럽게 ‘김일성 혁명전통’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혁명사적지는 성역화되었고, 혁명전통 교양은 북한에서 전국적이며 필수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제도화의 추세는 김정일 후계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김정일은 문화부문에서 혁명전통을 더욱 강조했으며, 김일성 가계는 혁명화되었다. 이후 혁명전통의 제도화는 1972년 헌법을 기점으로 정점을 맞았다.



기존 국내 학계는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을 대체로 소련과의 우호적 관계를 배경으로 당과 국가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해 나가는 바로 소개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기원을 먼저 분석함 역시 중요한데, 이는 실상 북한 역사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하기도 했으나, 김일성의 만주항일투쟁 국내 연구는 해외에 비해 미진한 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지속된 반공체제와 이데올로기적 경직성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가 도래하고 세계 역시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형국에, 여전히 사실을 부정하고 무시할 수는 없음이다. 사람의 행동 양태를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의 기원을 찾는 바이다. 즉, 사람이 만든 국가의 행동은 어떻게 국가가 만들어졌는지를 통해 분석해야 한다. 만주항일투쟁은 북한, 그리고 김일성의 정치적 기원이며 본글을 통해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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