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민회" 라는 독립단체..[ 상 ]

■ 조선국민회 ( 상 )편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는 1917년 3월 평양에서 평양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 출신자와 재학생 및 일부 교사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청년학생의 항일비밀결사였다. ☆☆ { (참조) 강덕상(姜德相),≪현대사자료(≫25, 35∼39쪽.
국사편찬위원회편,≪한국독립운동사≫2(1968). }


"조선국민회" 결성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일환(張日煥)은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1914년 9월 미주 하와이에서 이 지역 한인사회내에서 독립운동의 중심적 지도자로 큰 영향력을 가진 박용만을 만났다.

장일환은 박용만과 협의를 거쳐 국내에 청년단체를 조직하고 국내외가 상호협력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15년 4월 비밀리에 귀국한 장일환을 1차로 하와이 국민회원으로 활동하다 앞서 귀국한 강석봉(姜錫奉)·서광조(徐光朝)와 접촉하였다.

이어 1915년 겨울 2차로 안동현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세빈(白世彬)을 만나 박용만과 협의된 계획을 전하고 동지로 포섭하였다. 당시 백세빈은 중국 안동현에서 국내와 중국 및 미주지역과의 연결거점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어 장일환·강석봉·서광조 및 백세빈은 비밀결사조직에 관해 협의하고 1차 계획으로는 우선 운동에 필요한 자금조달방법과 운동근거지를 간도지역에 구축해 장래에 대비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실천에 옮길 즈음 국내에서 신한혁명당 관련인사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므로 이를 잠시 보류하고 회원 각자가 비밀리에 조직확대 및 동지규합에 힘쓰면서 조직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주력하기로 노선을 변경하게 되었다.
☆☆ { (참조) 강영심,<조선국민회연구(朝鮮國民會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293) 강영심,<신한혁명당의 결성과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2,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김정주(金正柱),<조선보안법위반사건>(≪조선통치사료≫5, 한국사료연구소, 1970), 629∼671쪽.
신한혁명당은 1915년 3월 상해에서 상해지역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의 중추인 신규식과 박은식 등이 중심이 되어 이상설, 북경지역의 세력, 북간도의 이동휘, 해산된 간민회세력 등과 연결하여 독립전쟁론을 실현코자, 각각의 운동노선과 이념차이를 극복하고 광무황제란 상징적 존재를 당수로 추대하여 독립전쟁론의 실현을 목표로 결성한 항일투쟁조직이다. 동당은 결성 직후 1915년 초 성낙형 등 당원 일부를 국내로 잠입시켜 광무황제를 알현하고 독일과 체결할 군사조약에 대한 황제의 인준을 확보하려는 계획을 실천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국내 관련인사 다수가 보안법위반으로 피체되었던 것이다. }


그 뒤 1917년 3월 23일 평양 신양리에서 장일환 등 10여 명이 모여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장일환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조직구성과 그에 따른 임원 선출 및 간단한 시행세칙을 마련하고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조선국민회가 내세운 궁극적인 목적은 구미세력의 동양진출과 더불어 점차 제국주의화하는 일본이 장차 동양침략 즉 중국에로의 침략을 위한 패권쟁탈이 머지않다고 보고 이를 적기로 이용하여 자주독립을 달성하려 함에 있었다.

조선국민회의 조직구성을 보면 회장에 장일환, 통신겸 서기에 배민수·안동현·백세빈, 경상도·전라도·황해도구역장으로 오병섭·강석봉·노선경을 각각 임명하였다.

체계적으로 정비된 형태는 아니지만 크게 두 가지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첫째, 본부격인 평양지역은 회장이 담당하고 그 외 지부적인 성격으로 각지에 구역장을 두어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으로 확대 발전시키려 한 면모를 나타낸다. 다음으로 내외통신 즉 국내외의 연락기구 설치에 중점을 둔 기구편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해외의 독립운동세력 특히 하와이 국민회와의 긴밀한 연계를 주요사항으로 했던 것과 아울러 중국 간도지역에의 조직확대를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간도지역 진출은 초기 조직과정에서 토지매입 및 근거지 구축방안도 시도한 바 있음으로 미루어 이 지역에 장기적 투쟁을 대비한 기지구축포석의 일환으로 보인다.

회원은 일반회원과 준비회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조직의 운영은 매년 봄에 정기적인 회의를 개최하기로 정하고 조직의 비밀보장을 위해 평양신학교 및 숭실학교가 개교하는 시기를 이용키로 하였다.

조직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각 회원이 갹출하는 회비로 충당하며 그 외 별도로 운동자금모집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회원상호간에 사용할 암호와 비밀문서 작성요령까지 마련해 두었다.

'조선국민회'는 국내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이면서도 하와이 국민회나 하와이 국민군단과 깊이 관련된 조직으로서 일면 국내지부적인 성격을 띤다. 실행세칙 중

첫째가 재미국민회와의 연락도모였던 사실과 암호 중 특히 하와이에 대한 암호를 작성하고 있는 점이다.

둘째, 박용만이 주필로 활약하고 있는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국민보≫의 배포를 중요활동으로 전개하고 있었던 점이다.

그런데 하와이 국민회를 이끌던 박용만은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되 필수적 요소로 국민의 2대 의무를 들고 있다. 이런 입장을 독립운동노선에 적용할 때 한인교포의 의무금제와 독립전쟁을 위한 군사의무의 하나로 상무주의 강조로 나타난다.

따라서 하와이 국민회와 연계된 조직으로 보이는 조선국민회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보인다.

조선국민회의 구성원은 20∼30대 초반이 대부분이고 10대도 4명이나 포함된 독립의식이 확고한 청년들이며 학력은 숭실대학 출신 5명·숭실대학생 2명·숭실학교 출신 4명·숭실학교 학생 4명 그 외 평양신학교 출신자 1명·경성 연회전문학교 학생 1명·군산 영명중학교 학생 1명 등이다. ☆☆ {(참조) 숭전대학 80년사편찬위원회 편,≪숭전대학교 80년사≫(1979). }


회원 대다수가 숭실학교 관련된 인물로 이들이 조직을 이끌어 가는 데 주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국민회는 숭실학교 관련자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그 외 평양신학교·경성 연희전문학교·군산 영명학교 학생 등도 함께 참여함으로써 각지 지식청년들을 연합하고자 계획한 면도 참작할 만하다.

또한 회원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서당교사로 활동한 이도 적지 않아 일선 교육현장에서 구국교육 실현을 통해 민족의식고취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회원 중에 기독교장로·교회조사 등이 있고, 신학교출신자, 기독교계통의 학교인 숭실·영명·연희전문학교 관련자들이 중심인 것으로 보아 대다수가 기독교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국민회가 당시 민족적 활동조차 철저히 봉쇄된 국내 현실 속에서 조직결성이 비교적 용이한 학교나 종교집회를 적극 활용한 측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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