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민회" 라는 독립단체..[ 하 ]

[ 하 ] 편



조선국민회는 동시대에 결성·활동한 비밀결사들과 마찬가지로 전국적 조직을 지향했으나 서북지방 일대가 중심적 거점으로 국한되었던 것, 회원 수도 20∼30여 명으로 나타난 것, 학연·지연 및 종교조직을 통해 조직을 결성한 것 등은 여타 비밀결사와 같다.

조선국민회의 활동은 근거지 구축과 조직확대 및 교육활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근거지 구축은 조선국민회의 결성 초기단계에서 계획했던 방안으로 간도지역에 토지를 구입하고 회원으로 규합한 동지를 이주시켜 장래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려던 것이었다.

이런 방침에서 일찍부터 국민회 회원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신민회의 국외독립군기지 창설이란 독립운동전략을 계승했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 그 실천단계에서 구상된 자금동원방안이 무모한 측면도 있으나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란 국제정세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려던 의도가 돋보인다.

보다 두드러진 활동은 조직확대와 회원모집 등을 통한 세력 강화였다. 즉 국내조직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평양에 근거를 두고, 경상도·전라도·황해도지역에 지부 성격의 구역장을 설치하고 각 지역에 연고가 있는 회원을 배치하였다. 즉 경상남도 고성군 출신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오병섭(吳柄燮)을 경상도 구역장에, 전남 목표출신으로 하와이에서 국민회원으로 활약하다 귀국한 강석봉을 전라도 구역장에, 황해도 재령출신으로 구역에서 회원모집에 노력하면서 그 지역에 국민회 세력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 목포·보성일대에 다소 근거가 마련되었다.

국내뿐 아니라 하와이 국민회와의 연락을 계속하는 한편 국민회 회원을 비밀리에 미주로 파견하려고 계획하였다. 미주지역으로의 파견을 군사양성계획의 일환으로 군사학교에 입학시키면서 일면 국내조직과의 원활한 연락거점으로 활용하려던 의도에서 계획되었다고 보이나 실천에 옮기기 전 조직이 발각되었다. 또한 중국지역으로의 기반확대를 위해 안동에 외국통신원을 배치하였는데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백세빈이 이를 맡게 되었다.

아울러 북경에도 1명의 통신원을 배치, 북경지역과도 연계를 계획하였다. 1917년 7월에는 간도지역과의 연락통신을 위해 추가로 로선경(盧善敬)을 서간도 삼원보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조선국민회는 조직기반을 확대해 가는 한편 회원간의 단결을 강화시키고 장차의 독립쟁패기회에 대비하여 무력준비계획도 수립해 두었다.

특히 회원들간의 단결의지를 공고히 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의지를 표명코자 혈서를 써서 맹약하는 이들도 다수 있었다.

즉 배민수·김형직·노덕순 등은 식지를 잘라 ‘대한독립’이라 혈서하고 어떤 이는 '결사'라고 혈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의지강고한 청년을 뽑아 회원으로 가입시켰으며 이후 이들을 항일투쟁의 역군으로 육성키 위해 중국 각지의 무관학교에 입학시킬 것을 계획하고 1차로 배민수를 중국 무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중국지역으로 파견하였다.

군사학교에의 입학추진계획과 아울러 무기구입 및 군자금조달을 위한 계획도 별도로 세웠다. 조선국민회의 중심인물들은 우선 무기를 구입키 위한 자금마련의 방안으로 각지의 유지를 물색한 후 회원으로 가입시킨 뒤 그에게 군자금을 출자케 하여 그 자금의 일부로 권총을 구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목적달성 이전에 조직이 발각됨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무력기반 조성계획이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무기구입계획, 암호를 사용한 비밀결사인 점, 그 암호가 독립군적 성격인 점, 회원들을 무관학교에 진학케 한 것들로 미루어 보면 이 조직이 계몽주의적 성격의 결사가 아니라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항일독립정신을 학생 및 일반인들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하였던 바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국민보≫의 배포활동과 교육현장에서 종사하던 교사들을 통한 민족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국민회의 활동을 통해 볼 때 이들이 지향한 운동방략은 계몽주의적 측면도 나타나지만, 독립군적 성격의 암호를 사용한 점, 무기구입 등 무력양성계획을 수립한 점, 독립전쟁론을 일관한 박용만과 협의해 조직된 청년단체인 점등으로 보아 독립전쟁론적 방략이 주된 흐름이었다. ☆☆ { (참조) 조동걸(趙東杰),<1910년대 독립운동의 변천과 특성>(앞의 책), 377쪽. }

조선국민회는 1918년 2월 경 일제당국에 발각되어 중국으로 도피한 사람도 있었으나 그 중 25명은 체포되었으며 장일환 등 12명의 중심인물은 재판에 회부되어 최고 3년형까지 받게 되었다. 비록 조선국민회가 일체측에 의해 발각되어 해산되기는 했으나 그 결사의 조직기반은 잔존하여 3·1운동 당시 평양중심의 시위운동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1919년 9월에는 박인관(朴仁寬)이 중심이 되어 대한국민회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도 하는 등, 회원 각자가 독립운동에 헌신, 활동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 3.1 운동의 이념, 사상, 집단의식


3·1운동의 이념, 사상, 집단의식과 관련하여 다음의 연구가 있다.

조동걸, 「3·1운동 전후 한국지성의 성격」(33회 전국역사학대회, 1990).

조항래, 「항일독립운동사에서의 대한독립선언의 위상」(『박성수 교수 화갑 기념론총 한국독립운동사의 인식』, 1991).

조항래의 연구는 「대한독립선언서」는 간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발표된 독립선언서로 「2·8」, 「3·1」 선언서보다 훨씬 일제에 비판적이며, 이념적 맥락은 1907년 이인영 의병장의 「대한관동창의대장」 명의의 「해외 동포에 보내는 격문」, 1910년 노령에서의 「성명회 취지문」, 「대한 독립선언서」로 이어져 무장투쟁을 지향하고,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이 된 기초자 조소앙의 삼균주의 사상이 여기에 배태되어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조항래(趙恒來)의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시기의 경위(」(『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론총 한민족독립운동사론총』, 1992)는 쟁점이 되어 온 ☆☆ { (참조) 송우혜, 「대한독립선언서의 실체」(『역사비평』, 1988년 여름); 조항래(趙恒來), 「무오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경위와 그 의의에 관한 검토」(『윤병석교수화갑기념논총』, 1990).}


이 선언서의 발표시기에 대한 견해로서 ‘1918년경’·‘1918년 11월년 경’·‘1919년 1월~2월경’ 3개의 설이 있는데 자신은 ‘1919년 음력 2월경’으로 추정한다고 주장한다.

김소진(金素眞)의 「1919년 로령 및 간도의 독립선언서연구」(『숙명 한국사론』 2, 1996)는 노령과 간도지역에서 나온 독립선언서 3종을 독립운동의 방략, 친일관, 국제정세,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분석함으로써 노령 간도지역 독립운동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 북한에서의 평가는

최영호(崔永浩)의 「북한에서의 3·1운동 평가」

(서암 조항래 교수 화갑기념 한국사학 론총, 아세아문화사, 1992)는 북한에서는 3·1운동의 근원과 중심지를 평양과 서북지방으로, 주동세력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조직, 지도한 「애국청년학생」들로 보며, ‘민족대표’들이 지향한 비폭력주의를 비웃고 폭력을 찬양하였으며, 3·1운동을 끝으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김형직과 김일성이 나타나는 새로운 역사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북한의 역사서술에 대해

① 역사서술에 새로운 주장을 많이 하고 있지만 방증 자료를 제시하지 않는다. 사료 해석상에도 문제가 많다.

② 역사서술이 지나치게 선동적이다.

③ 근대사의 설명이 김일성 가문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씌여져 있다.

④ 학문의 독립성에 큰 문제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

1917년(정사(丁巳))

1. 12.
의병 포군령장 김리도(金利道), 평양에서 체포되어 평양검사국에 송치.

1. 20.
전북ㆍ전남ㆍ경남ㆍ황해도 등지에 토지수용령 시행.
-안곽 저 〈조선문법〉 출간.

1. 23.
리기동(李起東)ㆍ한윤동(韓潤東)ㆍ홍승로(洪承魯)ㆍ서상한(徐相漢) 등, 동경로동동지회 조직.

1. 25.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인 이민규칙개정안 제출.

2. 1.
조선제당주식회사 설립.
-중국인 50여명ㆍ한인 25명, 만주 대랍자에서 화룡현상무회 창립.

2. 21.
리완용ㆍ권중현(權重顯)ㆍ한창수(韓昌洙), 불교옹호회 설립.

2. 24.
조선상업은행, 주주총회 열고 일인에게도 주주자격을 허용.

2.
상해 공동조계 곤명로에서 인성학교 설립.

3. 2.
간도창의소사령관 안종석(安鍾奭), 간도에서 체포되어 무산헌병대로 압송.

3. 5.
경성고보 교원양성소 조선產직獎려계원 최규익(崔奎翼)ㆍ윤리식(尹利植) 등 16명과 일반계원 리기종(李箕鍾)ㆍ안성수(安性洙)ㆍ안재홍(安在鴻)ㆍ리은상(李殷相) 등 130명 피체.

3. 7.
중국정부, 한청간도협약에 의거 재간도 한인의 거주권 및 토지소유권 인정.

3. 14.
농림학교ㆍ전문과규정 공포.

3. 20.
〈조선불교총보〉 창간.

3. 23.
장일환(張日煥)ㆍ김형직(金亨稷) 등, 평양에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조직.

3. 30.
김성수(金性洙),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3. 31.
리상고, 시베리아 니콜라예브스크에서 사망.
-니콜라예브스크의 한인, 한족회 조직. 기관지 〈청구신보〉 간행.

4. 9.
봉천에서 조선인회 설립.

4. 10.
종합잡지 〈반도시론〉 창간.
-행려병인구호김관리규칙 공포 시행.

4. 14.
김정호(金正浩)ㆍ김기영(金基永) 등, 개성전기주식회사 창립.

4. 26.
봉천 조선인회 총회에서 평의원 주창식(朱昌植) 등 10명 피선.

5. 14.
사립 세브란스련합의학전문학교 인가.
5. 25.

의병장 리진룡(李鎭龍)(석대), 평북에서 일헌병에 피체.

5. 31.
어업취체규칙 개정.

6. 1.
토지조查령시행규칙 개정 공포 시행.

6. 9.
면제 공포.

6. 15.
〈조선어법〉ㆍ〈회화집〉 간행.

7. 17.
조선수리조합령 공포.

7. 18.
전시해상재보험법 공포.

7. 21.
업무범위 확장한 동양척식회사령 개정.

7. 29.
간도지방 한인에 대한 취체권을 중국관헌으로부터 일본관헌으로 이관.

7. 31.
조선국유철도경영권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위탁.
-척식국관제 공포.

7.
신규식(申圭植)ㆍ조소(趙素)昂ㆍ박은식(朴殷植) 등 14명, 대동단결선언 발표.

8. 1.
평양동아연초회사 분공장 한인노동자 29명, 임금인상 요구 동맹 파업.

8. 31.
조선사회당,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선독립 요구서를 제출. 만장일치로 승인.
-김성수(金性洙) 등, 평양로동조합 조직.등등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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