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알기나 하는지?/(1948~1953)년..03편

《 03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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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8도선상의 전투


1950년 6월에 발발한 전쟁은 1949년의 유격전과 9개월에 걸친 38도선 부근 전투에 뒤이은 것으로 한반도 갈등의 내전적 기원을 파악하는데 필수부가결하다.


이승만은 1949년 6월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편성하고, 8월말에는 10만명에 달할 정도로 군대를 급속히 확장시켰다. 또한 중국 국민당과 함께 투쟁한 인물을 배제하고, 일본군 복무자를 군에 끌어들인다. (서북파 백선엽, 백인엽, 양국진, 김법석, 관북(또는 동북)파 정일권 등) 그렇게 한 주된 이유는 이승만 자신에게 전적으로 신세를 졌고, 공산주의를 협오할 뿐 아니라, 쿠데타를 일으킬 염려가 없다고 생각되는 군인들을 자기 주위에 포진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1949년 5월 4일 개성에서 남한측의 개전(공격)으로 나흘간 전투가 시작되는데, 이때 6개 보병중대 등을 투입하였다. 1사단 사령관인 김석원이 이끄는 병력은 38도선을 넘어서 송악산 부근을 공격하였다.


1949년 6월 마지막 일요일 새벽에는 옹진반도에서 호림유격대가 38도선을 넘어 침투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김석원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북한과 남한은 "언제라도 대규모 전투를 벌일 수 있다" 라고 브리핑 한다.


1949년 8월 4일 38도선 이북의 은파산을 점령하고 있던 18연대소속 2개 중대가 북한의 공격으로 전멸하는 일이 발생한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철원방면 북쪽공격을 감행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로버츠(William L. Roberts) 장군의 충고에 따라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제한된 증강군을 옹진에 보내는 조치로 마무리 한다.

당시 이승만은 장제스와 정삼회담을 하고 있었기에, 후에 보고를 받고 철원 공격 반대결정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로버츠 장군은 남한측 지휘관들에게 만약 북을 공격하면 주한미군사고문단을 철수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김일성 또한 이승만과 개념이 아주 비슷했기에 1949년 8월 전투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즉, 막다른 지역인 옹진을 공략하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개성을 장악 한 후, 추이를 지켜보는 작전을 통해 공격받기 쉬운 평양을 안전하게 방어하고, 잘 풀릴 경우, 곧장 서울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는 1950년 6월 25일 ~ 27일 사이에 한국군 제2사단(강원도 양구)과 제7사단(강원도 화천)이 무너지는 것이 의미심장함을 깨닫게 한다.


김일성은 8월 12일 옹진공략 구성을 평양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Terenti Shtykov, 1907~1964)에게 처음으로 이야기 하면서 옹진반도 해주 같은 지역을 점령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옹진이나 철원을 공격할 경우, 소련이 도와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남한이 공격을 유발하지 않아 안달이 나고 있었다.

평양주재 소련인들은 전면적인 내전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공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최후의 비책으로 마오쩌뚱의 원조를 기대하게 된다.


1949년 8월 23일 남한은 해군 초계정 몇척을 대동강 상류쪽 몽금포로 보내어 북한 35~45톤급 배 4척을 침몰 시켰다. 인천항에서는 북의 반격에 대비하였으나, 실제 반격은 없었다. 로버츠 장군은 남북 모두 38도선에서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말했다.


1949년 38도선상에서의 전투가 잠잠해 진후, 이승만과 김일성 양자는 모두 상대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위해 강대국들의 지지를 구했다. 양쪽 모두 1950년 여름이 1949년 여름 처럼 시작되리라고 예상했으며, 이번만큼은 영원히 요절내기를 원했다.


이승만은 워싱턴으로 부터 '남한이 도발하지 않았는데도 공격 받았을 경우에만 미국의 원조를 받게 될 것' 이라는 메세지를 받는다. 

김일성은 연 2%이자의 2.2억 루블 차관을 포함하여 스탈인의 외견상 동의와 마오쩌뚱에게 직접적인 지원
을 얻어내며 이승만보다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04편에서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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