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 6 >

《 6 》편


◇  한국전쟁 전야 ㅡ 지리산 토벌 (5) / 괘관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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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야

지리산 토벌 (5) 

괘관산 전투


3월 24일 06:00 무렵 태극기를 꽂은 트럭2량이 60여 인의 장병을 태우고 황점 북쪽에서 북상지서
를 향하여 왔다. 북상지서 주재원은 7인이었다. 그러나 국군이 간 기억이 없는 덕유산에서 국군이 출현한 것과 거동에 이상한 점이 있어서 정차를 명하였다. 트럭은 난사하면서 초고속으로 달려 위천지서 앞에 정거하여, 지서장을 납치하고 지서에 불을 지른 후 도주하였다.

한웅진 대위가 황점을 향하여 급히 추격한 결과 북상지서에서 8킬로가량 들어간 산 속에 고장 난 트럭이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반란군이 약탈한 물품을 달구지에 옮겨 싣고 운반 중이었다. 10여 인을 사살하고 여러 명을 포로로 하여 심문한 결과 “김지회, 홍순석의 일당 500인이 덕유산에 들어가 있다” 하였다. 마침내 김지회, 홍순석의 발자취를 포착하였다. 

김지회, 홍순석의 은신처를 찾은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는 3월 28일 밤에 분산하였던 각 대대와 경찰부대를 산청과 함양에 집결시키고, 20일 밤에 덕유산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30일 새벽에 일제히 포위망을 압축하였으나 반란군은 교전(교전 7시간 후 교묘하게 포위망을 뚫고 지리산을 향하여 탈출하였다.

한편 덕유산 공격 전날 밤, 3월 29일 밤에 반란군이 안의 북쪽에 나타났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은 한웅진 대위는 그들을 추적하여 도주 중인 반란군 90여 인을 사살하였다. 반란군은 괘관산에 들어갔다.

연일연야의 토벌로 지칠 대로 지쳤을 때에 공국진 대위가 달려와, “주력은 괘관산을 포위한다. 귀 대대는 즉시 함양에 전진하여 괘관산에서 지리산으로 도주하는 반란군을 포착하라” 하는 사령부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전투사령부는 반란군이 지리산에 옮겨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피곤에 지칠 대로 지친 한 대위는 불평을 쏟았다. “왜 우리 대대에만 임무를 주는가? 김지회를 추격하여 지난 14일 동안 불면불휴의 연속 작전으로 심신이 아울러 꼼짝 할 수 없다. 지금 출동은 불가능하다”.

 대위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이봐! 귀 대대를 내가 미워하여 명령하는 것으로 아는가? 실은 귀 대대가 지리산의 상황과 지형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야”.

 대위와 한 대위는 일군에서 함께 복무하였고, 같은 육사 2기생이기 때문에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한 대위는 흥분하여 권총을 빼 들고 “쓸데없는 말 하지 마!” 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명령 위반, 항명은 총살이다”.

“좋아, 그보다 먼저 내가 자네를 살해하마. 동기생이기에 참았더니 총살이라고?”

“마음대로 해!”

그러나 잠시 후 흥분을 가라 앉히고 운봉 방면으로 급진하여 국도를 따라 차단막을 구성하였다.

이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이 말다툼이 김지회를 사살하고 그 아내를 포로로 잡은 원동력이 되었다.

훗날 공국진 장군은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가 전투의 절정이었다. 모두 피곤하였다. 24일에 한웅진이 홍순석 일당의 발자취를 포착한 이래로 사령부도 부대도 불면불휴였다. 이번에 놓치면 이제까지의 수고가 물거품이 된다. 그 때가 게릴라와 끈기 내기가 되었다. 나뭇잎이 낙엽 지면 수색도 포착도 불가능해진다.

“24일부터 시작한 이 단계에서의 작전은 사령부의 이동이 595킬로(일일 평균 46킬로), 가장 기동성이 뛰어난 대대는 785킬로(일일 평균 64킬로. 단, 3분의 1이 차량 행군이며 그 외는 도보가 된다. 그러나 극도로 기장한 그 당시에는 반란군을 찾아 그렇게 먼 거리를 추격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여기서 추격을 느슨하게 하면 패배한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괘관산에서 포착하지 못하면 토로아미타불이다 하는 일념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가격한 말이 튀어나왔고, 한웅진도 피곤한 나머지 울컥했다고 생각한다”.

토벌군 주력은 괘관산 외곽지대에 전진하여 4월 4일부터 압축을 시작하였다. 괘관산 북쪽 천전동에 반도 약 100인이 숙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박격포의 집중 사격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기총으로는 효과가 없는 골짜기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5일, 괘관산을 완전히 포위한 토벌군은 질서 있게 공격하여 반란군 주력을 포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반란군의 부대 행동은 그것으로 종말을 고한 것이다. 공국진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역시 괘관산이 승패를 판가름하는 절정이었다 반란군은 부대 조직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지리산에 들어갔다. 한웅진의 덫에 걸리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그들이 확실히 지리산에 들어간 것을 포착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토벌군은 잠시도 쉴새 없이 다시 지리산을 포위하였다. 목표는 김지회와 홍순석이었다”.

     7편에서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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