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본인 요리사 수기..6편

《 6 》편


●  김정일의 요리사

■  바카라 상대해주다가 벤츠를 선물로 받아

◇  빈부의 차이가 세계에서 가장 심한 나라

그 무렵 북조선에서는 이른바 ‘외화 바꾸는 돈표’(외화 태환권,. 사회주의 국가에서 외화로 바꿀 수 있는 화폐)가 나돌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북조선에 왔던 1982년 당시에는 통용되는 화폐가 내화(북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폐)밖에 없었다.

1만 엔을 내화로 바꾸면 북한 돈으로 95~100원밖에 되지 않았다. 외화가 있으면 외화 결제가 가능한 낙원백화점에서 자유롭게 쇼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외화를 손에 넣기가 거의 불가능했고, 일부 특권층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시내 곳곳에서 외화를 노리는 소매치기가 들끓었다. 북조선만큼 빈부의 차이가 심한 나라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사회주의 체제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그렇게 빈부의 차이가 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벌려고 하면 스스로 일해서 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무리 일해도 수입을 늘릴 수 없다. 그들에게는 정말이지 얼마 되지도 않는 돈만 주어질 뿐이었다.

가난한 북조선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소매치기나 도둑질, 사기와 같은 범죄 행위에 빠져든다. 그들은 허가 없이 암거래를 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여성, 특히 주부들이다. 범죄를 저지르다 잡히면 즉시 수용소로 보내진다. 형기는 암시장에서 벌어들인 금액에 따라 결정된다.

북조선 화폐로 3,000원이면 6개월, 6,000원이면 1년, 6만 원이면 10년을 바깥 세상으로 나올 수 없다.

교육도 역시 일부 특권 계급층만 우대를 받는다. 북조선에서는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고등교육의 제1단계다. 외국어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면 평생 안락한 생활이 보장된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1,000달러나 2,000달러를 시험관에게 지불해도 좀처럼 입학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간부의 자녀들은 너무도 손쉽게 입학할 수 있다. 일단 입학하면 대학까지 순조롭게 진학할 수 있으며, 그 후에는 엘리트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노동자의 자녀들은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 때까지 노동자로 살아간다. 영하 10도나 20도의 혹한 속에서 죽을 때까지 삽자루를 손에 쥐고 일해야 하는 것이다.


○  바카라의 경품은 피아노, 금화, 벤츠


1987년 말에 일시 귀국했다가 이듬해인 1988년 1월에 북조선으로 되돌아간 다음부터 나는 매달 세 번 정도 김정일의 부름을 받았다. 게다가 3월부터는 초밥 출장이 아니라, 도박의 일종인 바카라 상대로 가는 일이 많아졌다. 그 당시 김정일은 바카라에 푹 빠져 있었다. 가진 돈을 칩으로 바꾸고 일정한 높이까지 칩이 쌓이면 경품을 받을 수 있도록 규칙을 정해놓았다.

경품은 호화로웠다. 일제 카메라나 CD 컴포넌트와 같은 가전제품, 온수청정변기(비데), 피아노, 김일성 금화, 소니 캠코더 등 하나같이 놀랄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정일이 갑자기 “후지모토, 운전면허증은 있나?”하고 물었다. 있다고 대답하자 김정일은 그곳에 있던 20명과 함께 나를 주차장으로 데리고 갔다. 김정일은 그곳에 있는 벤츠 중 한 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운전해봐.” 차종은 V280이지만 외형은 마치 V450처럼 보였다. 나는 귀국자로서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는 김영명이라는 사람과 함께 차를 타고 관저를 한 바퀴 돌았다. 김정일이 김영명에게 나의 운전실력을 묻자, 그는 매우 능숙하다고 대답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김정일은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후지모토, 그 차를 타고 가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 벤츠를 내게 주다니! 북조선의 운전면허증도 다음날까지 발급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식당으로 돌아가는 동안 줄곧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벤츠를 타고 돌아온 나를 보고 종업원과 귀국자 손님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이튿날 밤 나를 데리러 다시 사람이 왔다. 그는 내게 벤츠를 직접 운전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내 벤츠 번호판으로는 당 관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조선노동당 간부의 차번호는 ‘2.16’으로 시작된다. 김정일 생일이 2월 16일이기 때문이다).

앞에 가던 차가 관저에 도착해서 수위에게 지시하자 철문이 열렸다. 나는 차에 탄 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관저 내에 있는 8번 연회장의 오락장에 들어가자마자 김정일이 나를 맞았다.

“어제는 어땠어? 모두 부러워했나?” “예, 다들 부러워하며 난리였습니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좋아 좋아’를 연발하며 내게 면허증을 넘겨주었다. 자동차 번호와 관련해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1988년 어느 휴일에 모처럼 평양 시내의 동물원에 갔다. 내 주변에 있던 일본 여성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평남 순천에 살고 있으며 27년 전에 북조선으로 귀화했다고 말했다. 이름은 기타헤이 기쿠에였다.

그 후 그 일본인에게서 편지가 왔다. “나는 도쿄 스나마치에서 남편과 함께 살다가 북조선으로 왔다. 일본에 연락하고 싶은데 외화가 없어 전화를 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얼마간의 돈을 보내주기로 작정하고 별다른 생각 없이 2만 엔을 동봉한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곧바로 “덕분에 가족과 통화 할 수 있었다”고 적힌 감사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런데 그 편지로 나는 김정일 한테 문책을 받게 되었다. 일본 돈을 보내면서 편지에 “2.16으로 시작하는 번호의 차에 타고 있다”는 내용을 적었기 때문이었다.

평양 간부들의 생활은 일반인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리고 그 일로 내 편지가 검열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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