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알기나 하는지.?/(1948~1953)년..8편

8편


◇   반격전쟁

매카서는 그의 마지막 전과라고 할 수 있는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인천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시간을 잘못 선택하면 함대가 쉽게 좌초될 수 있는 위험한 항구이지만, 변화가 심한 작은 만과 개뻘을 통과하는 미군의 기동술은 흠잡을 때가 없었다.

북한은 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으며,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기에 전략적인 대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남한측은 11.1만명이 사망, 10.6만명 부상, 5.7만명 실종, 31.4만채의 가옥이 전파되는 등 의 피해를 입었다.


1950년 9월 30일 급속하게 퇴각하는 조선인민군병력을 밀어붙였다. 압록강을 향한 새로운 진격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신성불가침 '국제적인' 경계선이었떤 38선을 한국인이 넘었을때는 히틀러식의 침략이라고 주장을 야기 했지만, 이제는 남쪽에서 침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봉쇄논리를 뒤집으면서 미국은 북한이 패주시 38도선에서 멈추면 손해라고 생각했다.


1950년 7월경 존 앨리슨은 중부유럽의 국경선과는 달리 법률상의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극비 비망록을 준비한다. 이 경계선은 단지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합의 되었을 뿐, 미국은 다른목적에 대해 지속적인 타당성 등에 대해 공약한 적이 없다라는 내용이었다. 38선은 유럽의 국경선과는 다르기에 '가성의 선'으로 규정하고, 북진에 대해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이 문건을 딘 러스크에게 주고, 자신도 북진을 분명히 주장하는 비망록을 작성한다. 전쟁의 진로는 이제 "소련의 세력권 일부를 이탈 시킬 최초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미국정부는 북진을 하기로 결정하고, 트루먼은 8월말에 북진을 승인한다. 이 문서에는 '반격'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였으며, 중국국경인근 작전에는 한국군 부대들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10월에는 동해안을 휩쓸고, 38도선을 넘어 진격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하고,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수복한다. 하지만 인민군은 유격전을 하였고, 북은 중국공산당식 철수와 퇴각 젼략에 따라 자강도 강계에 사령부를 설치하여 후퇴한 김일성은 미군과 남측 군대를 포위하여 섬멸할 기회를 찾게 된다.


그 사이 동해안은 노출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기에 남한군은 지원을 받지 않고 중국 궁경까지 순조롭게 진격할 수 있었다. 미군폭격기는 인민군의 탈출로로 예상한 신의주를 향해 맹렬히 공격했지만, 만주로 부터 온 중공군과 조선인민군은 자강도 만포진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왔으며, 강계를 통과하여 장진호에서 미군을 대패시킨다.


빨치산들은 퇴로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10월 마지막 2주간 양양에서 약 1.5만명, 1,000명이 광주인근, 300명이 문경, 300명이 자수, 2,000여명이 정읍, 2~3,000여명이 목표인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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