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알기나 하는지.?/(1948~1953)년..< 10 >편

《 10 》편


■    중국의 참전

1950년 8월 4일 마오쩌뚱은 미국이 전세를 뒤집는다면, '의용군'이름 아래 북한으로 보낼 것이라는 의도를 정치국에 말했다.


9월 20일 CIA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을 그려보면서 여러 보고들(만주부대의 북한파견)을 주목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소련처럼 북한에 공개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미국과 중국의 전면전 위험이 증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1월 24일 매카서가 진격을 전행했을때 도자 CIA는 여전히 중국의 대대전인 작전계획을 암시하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9월 26일 중국 인민해방군 니중첸은 미국이 중국을 계속 자극한다면 중국은 저항할 수 밖에 없다고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인도대사 파니카(Sadar Panikkar)에게 말했고, 저우언라이 또한 미군이 38도선을 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파니카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10월 1일 미군이 38선을 넘자 마오쩌뚱은 즉각 개입하기로 결정한 후, 스탈린에게도 알린다. 중국의용군은 과거 중국내전에 참전한 조선의용군을 인용하면서, '상호의무', '국경방어'와 함께 '소련의 영향력을 밀어내기'를 고려하여 개입한다.


10월 22일 주한미군사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은 더이상 조직적인 방어를 할 능력이 없다고 봤다. 하지만 며칠 뒤 탱크와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유엔군의 최전방을 강타했다. 10월 26일 운산 산악지역에서 밀고내려와 미군을 피로 물들이고, 한국군 2군단이 파괴되었다.(초산전투, 50년 10월 23일~26일) 하지만 이 공세 후에 적의 부대는 사라졌다.


CIA일일보고서들은 연합군의 후방지역에서 대규모의 통합되고 잘 조직된 유격부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지만, 평가는 여전히 엇갈렸다. (전면전을 준비하는건 아니다 등)


11월 24일 매카서는 모든 전선에 걸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채 사흘동안 진행되었으며, 한국군 부대들은 중요도시인 청진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의 승리를 알리는 요란한 와중에도 적군부대의 긴행렬이 시골지역을 뒤덮고 있다는 조종사들의 보고는 묻혀버렸다.


11월 27일 적의 심층포위공격을 통해 연합군은 여러조각으로 쪼개지면서 미군은 장진호에서 밀려났고, 한국군 제2사단은 다시 붕괴되었으며, 이틀 내 전면철수가 뒤따랐다. (장진호전투 1950년 11월 26일 ~ 12월 13일, 흥남철수작전 1950년 12월 15일 - 12월 24일)


12월 6일 평양은 북에 의해 재 점령되었고, 12월 말경에는 서울이 다시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관찰자들은 적이 그들을 반드시 공격하는 것도 아닌데, 미군은 적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까지 빨리 철수하는지 궁금해 했다.


50년 11월 ~ 12월에 걸쳐 중국이 보낸 병력은 약 20만명 가량에 불과하였다. 물론 중국의 개입이 가져다준 충격효과는 미국이 북한 진격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새로투입된 조선인민군보다도 많지 않았던 병력이었다. 전략과 전투력 양면에서 북한측 기여도도 중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항으로 말미암아 매카서의 지휘능력에 대한 비판은 더욱 더 통렬하게 된다. 매카서는 중국의 명백한 위협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매카서의 군수품과 비교하면 턱도 없는 물자로 작전을 수행한 인민군의 용병술에 완전히 허를 찔리기도 했다.


훗날 딕 애치슨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불런 전투(Battle of Bull Run / 1861년 7월, 1862년 8월)이래 최악의 패전이라고 하였다.

   
    11편에서 계속~~^^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