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본인 요리인 수기 8편

《 8 》편



■  日 아내와 이혼하고 기쁨조 엄정녀와 결혼


◇   아내 엄정녀와의 만남

●   연회장의 호화로운 쇼


1988년 북조선에서 폭발적으로 히트한 노래가 있다. ‘첫 동요, 반갑습니다’(1991년 발표된 ‘반갑습니다’와는 다른 노래)라는 노래로, 텔레비전에서 방송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노래를 부른 사람은 엄정녀라는 여성 민요가수였다. 엄정녀는 물론 연주하는 그룹도 모두 김정일의 ‘기쁨조’ 멤버였다. 일본에서는 ‘기쁨조’로 통하지만, 정식으로 번역하면 ‘기쁘게 하는 조’가 된다.

어느 날 나는 평소처럼 8번 연회장의 철판구이 코너에서 초밥 만드는 일을 마치고 조리실로 내려갔다. 그런데 다른 요리사들이 서로 앞다투어 2층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뒤따라가보니 어디선가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살며시 문을 연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화려한 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을 듯한 거대한 스피커에서는 연신 음악소리가 울려퍼지고, 조명장치도 사방에 설치되어 있었다. 마치 딴 세상이라도 온 듯 화려한 광경에 넋을 잃은 채 한동안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곧 나도 연회석의 좌석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엄정녀라는 가수는 자주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북조선에서는 보기 드문 짧은 머리 스타일이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 눈이 그녀를 쫓고 있었기 때문일까. 내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재빨리 간파한 듯 김정일은 엄정녀를 내 옆에 앉혔다.

■   엽기적인 여자 복싱


어느 날 9번 연회장 목란관에서 여성 복싱 경기가 열린 적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마카오 출신의 알로에라는 무역상과 함께 심판을 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출전 선수들 중 한 사람이 가수 엄정녀였다. 1회전은 두 번이나 다운을 뺏은 엄정녀가 이겼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런 내 모습을 김정일이 줄곧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2회전에서 엄정녀와 싸울 상대는 엄정녀에 비해 몸집이 컸으며 보기에도 훨씬 강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이번에는 엄정녀가 두 번 다운당했다.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애처로워 보였다. 시합이 끝난 후 나는 엄정녀에게 손을 내밀어 다정한 목소리로 “수고했어요”하고 말을 걸었다. 엄정녀를 격려하고 나서 내 자리로 돌아오자 김정일이 물었다.


“후지모토, 복싱 경기를 본 소감이 어떤가?” “여자 권투는 더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김정일이 다시 물었다. “엄정녀가 두 번이나 시합을 했기 때문인가?” 나는 그 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코피를 흘리는 모습이 안쓰러워서라고 대답했다. 그 날 이후 내가 알기로 여성 복싱 경기는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   일본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


어느 날 느닷없이 김정일이 내게 물었다. “엄정녀를 좋아하나?”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김정일은 혀를 찼다. “그것만은 나도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스스로 노력해봐, 게다가 후지모토는 일본에 아내가 있으니 그 점도 생각해봐야 할 테고 말이야.” 계절은 겨울로 바뀌어 12월도 절반이나 지나갈 때였다. 뜻밖에도 김정일은 새해를 일본에서 보내도 좋다고 허락해주었다.

문제의 서약서 건으로 5년은 귀국할 수 없다고 믿고 포기했던 터라 나로서는 너무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에 돌아가면서 나는 커다란 숙제를 끌어안게 되었다. 김정일이 엄정녀와 결혼하고 싶으면 일본에 있는 아내와 이혼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내가 아내와 잘 상의해서 합의 이혼을 하면 위자료도 대신 지불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평양으로 돌아올 때 이혼증명서만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아무도 나를 마중나온 사람이 없었다. 우리 가족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로 변해 있었다. 귀국하기 전인 지난 10월, 나는 한 통의 보고서를 받았다.

일본에 있는 아내의 남자 관계에 관한 내용이었다. 조총련에서 한 짓이 뻔했다. 그들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와의 전화는 도중에 끊겨 버렸다.


나는 망연자실하면서도 도저히 아내를 나무랄 수 없었다. 오랫동안 가족도 돌보지 않고 이역만리 먼 땅에서 나 역시 엄정녀라는 여성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니 나무라기는커녕, 그런 나와 살면서 23년간이나 잘 참아준 아내에게 감사와 사죄의 마음을 전해야 할 형편이었다. 마치 정해지기라도 한 일처럼, 아내와의 이혼 절차는 별다른 잡음 없이 진행됐다.

아내에 대한 위자료 3,000만 엔과 열다섯 살인 작은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의 양육비 1,800만 엔(매달 30만 엔씩 60개월)등 총 4,800만 엔(한국 돈으로 약 4억 8,000만 원)을 지불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1989년 1월 우리 부부는 정식으로 이혼하기에 이르렀다. 두 딸의 친권은 내가 가졌다. 그해 1월에 바로 호적을 정리했는데, 그 달에 큰딸이 생일을 맞으면서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호적등본을 가지고 다시 북조선으로 건너갔다. 간부들은 저마다 위자료는 그렇다 치더라도 양육비가 월 30만 엔이나 되는 것은 너무 심하다며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나는 일본의 교육비가 비싸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사실이라고 설명하고, 만약 이 건으로 소송이 걸렸으면 반 년 이상은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이 괜찮다고 말하자 간부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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