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C-68, 6.25전쟁.(미군정)

◇ NSC-68, 6.25전쟁.(미국군정)



수난(受難)이란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힐 당시 받은 고통을 의미한다. 


"The Cold War and Its Origins, 1917– 1960"(냉전의 기원 1917-1960)란 제목의 1961년에 발간된 저서에서 미 미시건대학 교수 플레밍(D.F. Fleming)는 1945-1954년의 기간, 즉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이후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1954년의 기간을 미국이 자국 중심의 패권의 기틀, 냉전의 기틀을 마련할 목적으로 한국에 엄청난 고통을 강요한 기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소위 말해 그는 이 기간을 '한국의 수난기(crucifixion of Korea)'로 표현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세계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과 동시에 미국은 지구상 도처에 많은 기지를 구축했으며, 대전 당시 점령한 지역 밖으로 더 이상 소련이 팽창하지 못하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같은 외교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파워, 예를 들면 병력과 국방비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전후 미국의 국방비와 병력이 지속적으로 감축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1천만에 달하던 미군 병력은 1947년 경에는 100여 만으로 감축되었다. 800억$ 이상의 국방비가 130억$ 규모로 삭감되었다.



이 같은 미국의 반전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1950년 2월부터 4월의 기간에 작성된 NSC-68, 그리고 이 문서가 작성된지 2개월만에 발발한 6.25 전쟁이었다. 오늘날 이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점이다. 한편 미국의 일부 학자, 예를 들면 플레밍은 전후 미국의 한반도 점령 정책, 미군 철수, 6.25 전쟁,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이르는 일련의 정책이 진행된 1945년부터 1954년의 기간을 한국이 자유세계를 대신하여 수난을 당한 기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먼저 1945년부터 1948년 8월 15일 이전의 미 군정 기간 동안은 물론이고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미국은 남한 지역을 반공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10만 이상의 한국인이 희생되었다. 한편 북한에 진주한 소련은 북한 지역을 철저한 공산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남북한 국민 모두는 남북통일을 열망했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남북통일을 열망했다. 6.25 전쟁 이전 38선 부근에서 빈번히 벌어졌던 무수한 충돌은 남북통일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처럼 긴장이 극도로 고조된 상태에서 미국은 1949년 7월 초순 미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켰다. 그런데 철수 당시부터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 후 비밀 해제된 자료에 따르면 철수 이전부터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예견했다. 


이 같은 한반도 전쟁에 대비하여 미국은 이미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유엔군 형태로 경찰 활동 형태로 한반도 전쟁에 참전할 것을 사전 계획했던 것이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의 미국의 반응은 이 같은 전쟁을 미국이 사전 예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플레밍은 말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6.25 전쟁 전문가들은 당시 반공세력과 공산세력이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수 없는 구도였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1949년 8월 29일의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1949년 10월 1일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기점으로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요구를 수용했다. 이 같은 스탈린의 남침 허용을 모택동이 지지했다. 


남침 지원 목적으로 1949년 말경부터 6.25 전쟁 이전까지 모택동은 국공내전을 통해 단련된 2개 사단 규모의 조선인민해방군을 북한 지역으로 보내주었다. 남침의 선봉에 섰던 사람은 바로 이들이었다. 스탈린은 전차, 항공기와 같은 중무장 전력을 대거 보내주었다.


한편 1950년 1월 12일 한반도를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시킨다는 에치슨 발언에 더불어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 존슨 국방부장관, 에치슨 국무장관은 소련과의 전면전에 대비한 미국의 태세를 다양한 유형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태세로 전환을 추구했다. 


이들의 의도를 반영하여 1950년 4월에는 NSC-68이란 문서가 작성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문서에서 가정하고 있던 국방비가 당시와 비교하여 거의 3배 이상이란 사실이었다. 당시 미국의 GDP는 2500억$, 국방비는 130억$  수준이었다. 그런데 NSC-68에서 가정하고 있던 국방비는 400억$ 이상이었다.


​평시 이처럼 많은 국방비를 조달하고자 하는 경우 엄청난 충격이 요구되었다. 6.25 전쟁은 이 같은 충격을 국제사회에 가하기 위해 미국이 유도한 형태의 전쟁이란 것이 플레밍을 포함한 일부 미국 학자들의 주장이다. 


플레밍은 1945년부터 10년의 기간을 한국이 미국의 패권 기틀 마련을 위해 대신 수난받은 기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1952년에 발간된 The Hidden Stroy of Korean War(한국전쟁의 숨겨진 이야기) 란 제목의 책에서 I.F. Stone(스톤)은 6.25 전쟁을 미국이 유도한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책을 저술할 당시 스톤은 미국이 NSC-68이란 문서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6.25 전쟁 도발 전후의 미국의 여러 수상한 행위와 조치, 예를 들면 일본과의 평화협정 체결과 일본의 재무장, 대만 장개석 정권 지원, 나토 강화 등과 관련된 일련의 행위와 조치에 더불어, 6.25 전쟁 발발 직전의 한반도 상황을 미국이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 에치슨, 맥아더, 덜러스, 트루먼과 같은 미국의 주요 인사들의 한국전쟁 관련 발언과 행위의 모순.이승만 또한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을 1950년 5월부터 거론하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언급하며 6.25 전쟁을 미국이 유도했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플레밍이 주장하고 있는 바처럼 전후 10년의 기간은 미국의 패권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한국의 수난의 기간이었는가? 6.25 전쟁은 이 같은 기틀을 마련해준 결정적인 순간인가?


​이 같은 문제점을 미국의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반면, 한국 학자들의 경우 이 문제를 거의 거론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그런데 이들이 너무나 객관적이고 권위있는 자료, 너무나 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이처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며, 이들의 주장에 개인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대한민국 입장에서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연구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전혀 알지도 못한 동방의 나라를 수호천사와 같은 심정으로 지켜주기 위해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상기 사실이 너무나 배치되기 때문일까? 


국방부는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최근 이처럼 표현했다. 미국에 불리한 듯 보이는 내용을 발언하는 경우 군사정권 당시까지만 해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기 때문일까?


   이상..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