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ᆞ이 ᆞ 오 3편

전쟁전야..3


한국전쟁 전야 (3) ㅡ 지리산 토벌 (2) / 


호남지구 전투사령부 



1948년 10월 27일에 여수 탈환이 이루어지고, 최남근 중령과 조시형 중위의 보고로 반군 주력이 지리산 일대에 잠입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반군토벌 전투사령부는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로 개칭되고 본격적인 추적 토벌을 개시하였다. 순천을 탈회하고 1주일 후였다.


백인엽 소령의 제12연대는 12월 28일에 구례에 집결하여, 다음날 29일부터 지리산의 소탕 토벌을 시작하였다. 21일의 순천 공격 이래 주력을 기울여서 적의 주주력부대를 향해, 쉴새 없는 공격을 했다.


그 때 비로소 SCR 300 (통달거리 30킬로미터의 휴대 무선기) 이 교부되어 부대의 사기는 높았다. 상대가 가지지 못한 새 장비는 사기의 원천이다.


백인엽 소령은 주력을 이끌고 우선 명찰 화엄사에서 부처님께 절하고 빌면서 반군 소탕을 기원하였다. 그리고 승려를 안내자로 세우고 노고단(산) (1507 고지) 의 소탕 토벌을 개시하여, 제2대대 (김희준 대위) 와 제3대대 (이우성 대위)를 통솔하며 굴이나 골짜기 전체를 훑으며 노고단을 향하여 공격하였다.


공격부대는 곧 반군의 일부와 접촉하였으나 워낙 깊은 산속인지라 준엄한 지형과 울창한 원시림 때문에 공격하지 못하고 날이 저물었다.


다음날 30일과 다음 다음날 31일에 산 속을 뒤졌으나 반군은 급속히 분산,갈라졌는지 발자취도 찾지 못하였다. 토벌대는 건빵을 먹으며, 동상 환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작전을 하루 더 연기하여 수색을 계속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11월 1일, 백인엽부대는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지휘하는 연대 주력(제1대대, 허암 대위와 하사관 교육대 기간과 교체하여 군산(群山)에 귀환하였다.


그보다 앞서 10월 30일, 총사령부는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를 북부와 남부지역으로 양분하여, 북부지구 사령관에 제2여단장 원용덕 대령을, 남부지구 전투사령관에 김백일 대령을 임명하였다.


제12연대장이면서 군산에 잔류를 명 받고 허송세월하며 한탄 하던 백인기 중령은 각 일부로 구례역과 파도리(把道里)(구례 동남 6킬로)를 경비하게 하고, 주력부대는 구례에 집결하여 활발한 수색 공격을 개시하였다. 자갈까지 뒤졌으나 반군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1월 3일 밤, 파도리에 배치되었던 제12연대 하사관교육대(김두열 소위 이하 100여인)가 김지회 부대의 기습을 받아 김두열 소위 이하 약 90인이 포로가 되어 지리산 깊숙이 끌려갔다. 요행히 탈출한 성찬호 상사 이하 10여 인이 급히 알렸기 때문에 백인기 연대장은 1개 중대로 추격하게 하였으나 행방이 묘연하였다.


성 상사의 보고에 따르면 마을주민들이 군대 주둔을 환영하여 술상을 차렸다. 거기서 경계심이 느슨해져 보초가 적의 접근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진심 어린 환영이 아니라 반군과 내통한 책략이었을 것이다.


제2대대는 다음날 4일, 날이 채 밝지 않았을때 다시 출동하여 화엄사 부근을 소탕 토벌하여 유기 사체 8명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반군 주력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그 날(11월 4일) 남원에 사령부를 설치한 북부지구 전투사령관 원용덕 대령은 예속관계(隸屬關係)의 변경을 빌미로 지휘관 회동을 개최하기 위하여 각 부대장을 남원에 모여 참가시키게 하였다.


명령 전달은 경찰 전화로 행해졌고,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에게는 구례경찰서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당시 무선은 휴대용 단거리 무선뿐이었다. 때문에 부대간의 연락은 전면적으로 경찰 전화에 의존하였다.


백인기 중령은 헌병 1개 분대를 경호로 스리-쿼터에 태우고 구례를 출발하였다. 15시 30분이었다. 서시천 천곡도를 북상하면 바로 남원이다. 행정은 30킬로 미만이어서 한 시간이면 남원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17시00분이 되어도 백 중령은 남원에 도착하지 않았다. 남원에서 구례에 조회해보니 이미 도착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소동은 커졌다. 우선 1개 대대가 구례에서 연대장의 진로를 따라 남원에 향하였으나 날도 저물고 이상이 없었다. 수색대는 빈 손으로 남원에 도착하였다. 또다시 제2대대장 김희준 대위는 화엄사 부근에서 정보를 수집하였으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11월 5일 01시00에는 백인기 연대장은 행방불명인 것으로 단정하고, 날이 새면 다시 수색하기로 하였다. 또는 백인기 중령은 반군에 합류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날 11월 5일 04:00에, 제2대대는 동원된 경찰대와 함께 남원으로 향하였다. 제5중대(김한주 중위)가 맨 앞에서 경계ᆞ수색임무를 맡은 중대였으나, 선두 차량에는 연대 작전주임이, 제2 차량에는 대대장 김희준 대위가 승차하였다.


제5중대 선두 차가 산마을 굴곡부에 이르자 전혀 뜻밖에 마을과 서쪽 고지에서 포탄이 군인들의 앞뒤 양옆에서 교차되어 쏟아져 떨어져 터졌다. 저항할 틈도 없이 제5중대 거의 전원이 작전주임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둘째 차량에 승차하였던 김희준 대대장만 팔에 관통상을 입으며 필사로 엎드려 배를 땅에 대고 기어서 후퇴한 결과 대대 주력군에 의하여 구출되었다.


대대 주력은 박격포의 지원 아래 공격하여 1개 중대로 예측되는 반군을 격퇴하였으나, 반군은 제5중대의 포로 70-80명을 끌고 산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반군 진지에는 3인의 시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 한바탕 싸움으로 대대가 받은 손해는 심히 컸다. 전사 43-50인, 부상자 약 50인에 이르고, 그 외에 제5중대 70-80인이 반군에게 연행된 것이다.


후에 안 사실로는, 반란군은 구례의 군대가 반드시 연대장 수색을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1개 중대로 매복하여 기다렸다. 1개 대대가 북상하여 왔기 때문에 가까이 유인하여 기습하였다고 한다.


오후, 부근을 수색한 결과 자결한 백인기 연대장의 유체가 농가에 안치되어 있었다. 부근 주민의 말과 후에 귀환한 헌병의 보고를 종합하면 백인기 중령이 자결한 때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4일 16시 무렵 백 중령 일행이 산속의 어느마을에 접근하자 갑자기 집중사격을 받았다. 놀란 운전병이 급정차 하였다. 차에서 퉁긴 백 연대장은 헌병들을 질책(叱責)하며 차를 방패 삼아 권총으로 응전하였으나, 우선 헌병 분대장이 권총을 강에 떨어뜨렸다고 핑계하며 도주하였다. 백 중령은 부근 산에서 구원을 기다리려 하였으나 헌병들은 연대장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결국 6인이 사살당하고 몇 명이 탈출에 성공하였다.


혼자 남은 백인기 중령은 권총을 계속 빨리 쏘면서 후퇴하였다. 반란군 약 1개 소대가 추격하였다.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백 중령은 부근 농가에 들어가 자기의 신분을 밝힌 후에 내 시체를 보관하였다가 내일 국군이 오면 인도해 주기 바란다 하고 유언한 후 부근 대나무 숲에 들어가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농가의 증언에 따르면 백인기 중령의 자결은 17시(오후5시) 무렵이었다고 한다. 백 중령이 자결한 대나무로 이루어진 숲에는 습격 받은 지점에서 150미터가량의 거리라고 하였다. 반란군은 백 중령을 추격하여 자결한 유체를 확인하고는 안 됐다 하며 물러났다 하고 알려주었다. 또한 후에 붙잡힌 반란군 중 한 사람은 생포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위협 사격을 가하였다하고 진술하였다.


백인기 중령 일행을 반란군이 매복하여 기다린 것은 산속의 마을을 점령한 반란군이 경찰 전화를 도청한 결과였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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